尹대통령에 "노골적 편향"...무례한 말 쏟은 러의 '숨은 속내'

정영교 2024. 2. 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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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사진 러시아 외무부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라고 비판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31일, 제57차 중앙통합방위회의)을 두고 한국과 러시아 외교 당국이 1~3일 거친 설전을 주고받았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윤 대통령 발언을 "노골적인 편향"이라고 비난하자, 한국 외교부는 "혐오스러운 궤변"이라고 쏘아붙였다. 외교가에선 러시아의 대응을 두고 북한과의 군사적 밀착을 '정상적인 외교'로 포장하려는 의도로 풀이했다. 또한 한·러 관계의 '레드라인(넘어야 하지 않을 선)'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지원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과잉 대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 대사 초치해 엄중 항의


외교부는 3일 오전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의 논평에 대해 "일국의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으로는 수준 이하로 무례하고 무지하며 편향돼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의 수사와 무력 도발이 한반도와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현실을 도외시한 것으로서, 국제사회의 규범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국가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혐오스러운 궤변"이라고 덧붙였다.
외교부 전경. 뉴스1

또한 같은 날 오후 정병원 외교부 차관보는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를 외교부로 초치해 항의했다. 외교부는 정 차관보가 "러시아 측이 진실을 외면한 채 무조건 북한을 감싸면서 일국 정상의 발언을 심히 무례한 언어로 비난한 것은 한·러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앞서 자하로바 대변인은 1일 공식 논평에서 "북한이 '선제적 핵 공격'을 법제화한 세계 유일 국가라 주장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노골적으로 편향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국·일본 등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뻔뻔한 정책으로 한반도 및 주변에 긴장과 갈등이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은) 혐오스러워 보인다"고 비난했다.

'혐오스럽다' 등 원색적인 단어까지 동원한 양국 외교 당국의 설전은 통상 외교적 수사의 범위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외교가에선 "러시아 측이 상대국 국가수반의 발언을 외교부 대변인 수준에서 비판한 것 자체가 심각한 외교적 결례"라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9월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보스토니치 우주기지 참관을 하는 모습. 조선앙TV 캡처, 뉴시스


北 앞세워 견제구 날렸나?


일각에선 러시아의 날 선 태도는 최근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군사 지원에 대해 언급한 것과 연관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앞서 신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제한된 점에 대해 "정부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가야 할 길은 전면 지원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신 장관 등의 발언이 한국 정부가 자국이 설정했던 '레드라인', 즉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무기 지원을 고려하는 움직임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양국 관계를 파탄낼 것이란 경고성 메시지를 발신하려던 과정에서 자하로바 대변인이 과잉 대응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설전이 발생한 시점도 의미심장하다. 지난 2일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차관은 한국을 방문해 김건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정병원 차관보를 잇달아 만나 양국 간 현안과 북핵 문제 등을 협의했다. 양국 간 외교 일정이 진행되는 시점에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상대국 정상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 타스, 연합뉴스


반복되는 러 '외교 결례'


지난해에도 한국을 향해 '외교 결례'에 해당하는 러시아 측의 언행이 논란된 적 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지난해 9월 윤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에 대해 "대한민국의 수장이 북·러 협력을 깎아내리는 선전전에 동참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같은 달 19일 장호진 당시 외교부 1차관이 안드레이 쿨릭 당시 주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러·북 간 무기거래와 군사협력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자, 다음 날 대사관 측 SNS에 "한·미 언론이 과장되게 유포하는 추측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한국 파트너에게 정확히 밝혔다"는 반박성 글을 게시했다. 당시 외교가에선 "러시아가 한·러 관계 악화를 개의치 않겠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와 관련,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기본적으로 상대국의 외교적 결례에 대해 필요한 대응은 해야 한다"면서도 "전술적 호흡 고르기(tactical pause)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해 이해득실을 철저히 계산하고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시각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 외무부는 4일(현지시간) 루덴코 차관의 방한과 관련해 "러시아 측은 이 지역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이 자신의 지정학적 목표를 위해 군사 등 분야에서 무책임하고 도발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역내 동맹국이 공격적인 계획을 실행하도록 밀어붙이는 게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는 역내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기 위해 국제법 규범에 따라 북한과 호혜적 협력을 발전시키겠다는 의향을 한국에 표명했다"고 덧붙였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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