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다이어리]험난했던 미국 월셋집 입성기
뉴욕 특파원으로 부임해 2주 전 미국에 도착했다. 싱글 하우스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해외살이는 처음인 데다 2년 단기 부임이다 보니 익숙한 아파트(미국 콘도)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착한 날 한국에서 미리 연락을 주고받은 부동산 중개업자를 만나 집을 몇 군데 둘러본 뒤 곧바로 한 곳에 입주하기로 했다. 수백 세대가 사는 20년 된 콘도였다. 2주 정도 호텔에서 머물 각오로 들어왔는데, 입국 당일에 집을 구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콘도 내부 절차가 있어 입주는 며칠 뒤 가능했지만, 임대인도 아버지뻘 되는 서글서글한 한국인에, 빌트인 가전도 모두 새 제품이라니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임대인이 임차인을 들이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집 점검 절차가 문제였다. 내가 집을 구한 뉴저지에선 집주인이 집을 팔거나 세를 놓을 때 각 자치구로부터 이른바 '계속 점유 증명서(Certificate of Continued Occupancy·CCO)'를 발급받아야 한다. 매수인이나 임차인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지 관공서 직원이 나와 점검하고, 안전 기준을 충족해야 CCO를 발급해준다. 입주 첫날 만난 임대인과 중개인은 "무조건 통과된다"며 다음 날 관공서 직원이 나오는 한 시간만 집을 비우면 된다고 했다. 원칙적으로 CCO를 받기 전에 임차인을 들이면 안 되니 짐은 풀지 말고, 한국에서 들고 온 대형 캐리어와 이민가방 두 개는 창고에 꼭 숨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집 점검 과정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꼬박 사흘 동안 세 번의 거절을 당한 뒤 사수 만에 성공했다. 중개인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첫날은 화재경보기가 문제였다. 경보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위험에 대비해 배터리뿐 아니라 전선 연결로 이중장치를 갖춰야 하는데 전선이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날은 현관문이 쉽게 닫히지 않아 퇴짜를 맞았다. 수백 세대가 사는 콘도에서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히지 않으면 화재 발생 시 불이 바깥으로 쉽게 번질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손으로 밀지 않아도 문이 닫혀야만 합격이었다. 셋째 날도 탈락이라는 연락을 받자 이유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쯤 되니 집에 들어갈 수는 있을까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화기 위치가 문제라고 했던 것 같다. 화재 위험이 높은 주방에서 가까운 곳에 소화기를 둬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했다. 지금 뉴저지주 관련 규정을 찾아보니 주방에서 열 발자국 이내에 소화기를 둬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다.
안전 점검에 퇴짜를 맞았던 며칠 동안은 불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 풀어 놓은 짐을 이민가방에 싸고, 저녁에 들어와 다시 이민가방에서 짐을 꺼내는 일이 반복됐다. 성격 급한 한국인 중에서도 특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 정도다 보니, 임대인은 물론 관공서 직원에게까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한 번에 하나씩만 지적해 골탕을 먹이는 건가 싶었다. 세 번의 퇴짜 끝에 어렵게 미국 월셋집에 '입성'한 지금은, 과정이야 어떠했든 그 직원이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임차인과 이웃의 안전을 위해 임대 물건을 철저히 점검하고, 안전 기준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겠다는데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하고도 남을 일이다.
한국에서 세입자로도, 집주인으로도 살아봤지만 안전 점검이란 건 들어보지 못했다. 재건축을 앞둔 수십 년 된 소위 '썩다리' 아파트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은 지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이 수두룩한 뉴욕과 같은 비교는 힘들 순 있다(뉴욕에도 CCO와 비슷한 절차가 있다). 미국은 기업형 임대가 대부분이라는 것도 우리와는 차이점이다. 분명한 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안전을 중시하는 미국 행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니 부러움과 씁쓸함이 교차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진 연이은 노후 아파트 화재 사건이나 '순살 아파트' 논란은 철저한 안전 점검이 선행됐다면 없었을 일일지도 모른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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