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봉쇄시킨 유럽 농민 트랙터…"불공정 경쟁에 다 죽는다" [글로벌리포트]

박소영 2024. 2. 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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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공정한 경쟁 때문에 농민들이 죽고 있다.” "
지난달 시작된 프랑스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를 이끈 제롬 벨은 AFP통신에 이렇게 호소했다. 벨은 2015년부터 아버지가 남긴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럭비선수였던 그는 평생 소를 키운 아버지가 경영난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농장을 물려받았다.

지난달 31일 프랑스 파리 남부 칠리-마자랭 고속도로를 점거한 트랙터 앞에 농부 복장을 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인형이 걸려 있다. 프랑스 농부 제롬 벨은 농민들의 높은 자살률을 나타내기 위해 농부 차림을 한 마네킹을 매다는 시위를 벌였다. AP=연합뉴스

이후 시련의 연속이었다. 가뭄과 가축 전염병이 덮친 데다 에너지·비료 가격이 폭등했다. 각종 환경 규제가 늘고 정부의 보조금은 줄었다. 결국 벨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트랙터를 끌고 고속도로로 나갔다. 아버지와 같은 죽음을 막자며 시위 중 고가도로에 농부 차림의 마네킹을 매달기도 했다.

며칠 만에 트랙터로 차량 흐름을 막는 ‘달팽이 작전’이 프랑스 곳곳으로 퍼졌고, 결국 전국 농민이 합세해 수도 파리를 사실상 봉쇄했다. 나아가 벨기에·이탈리아·포르투갈·그리스·헝가리·루마니아·리투아니아에소도 시위가 들불처럼 퍼졌다.

프랑스 정부가 잇따라 대책을 내놓자 지난 1일(현지시간) 농민단체들은 2주 이상 지속한 트랙터 시위를 일단 중단하기로 했다. 하지만 불씨가 꺼진 건 아니다. 같은 날 유럽연합(EU) 특별정상회의가 열린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 주변에선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몰려온 농민들이 1300여대의 트랙터를 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유럽 농민들이 지난 1일 벨기에 브뤼셀 유럽의회 건물 주변에서 EU 농업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AP=연합뉴스

"생산비 올랐는데 판매가는 떨어져"

차준홍 기자

유럽 농민 시위의 배경은 복합적이다(표). 뉴욕타임스는 “오랜 기간 누적된 다양하고도 깊은 분노의 결과”라고 전하면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비료 가격의 폭등, 대형 유통업체의 마진 폭리와 원가 인하 전가 부담, 해외 농산물과 자국 농산물에 대한 이중잣대 등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농민 불만의 핵심은 생산비 부담은 커졌으나, 시장 가격은 낮아졌다는 점이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지난해엔 EU 27개 회원국 중 11개국의 농산물 가격이 전년 대비 최대 10% 이상 하락했다. 값싼 농산물의 대량 유입이 주된 원인이다. EU가 전쟁으로 흑해 수출이 막힌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한 수입 할당 제한을 유예하고, 관세도 면제했다.

이에 직격탄을 맞은 폴란드·헝가리·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에서 지난해부터 농민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올 초 서유럽 국가로 옮겨붙었다. 극빈층으로 전락해 최저생계비를 받는 처지가 된 프랑스 농민 장 마리 디라트는 “지난 1년 새 연료·비료 등에 드는 농장 운영비가 3만5000유로(약 5000만원)로 늘어 실질 수입이 바닥이 됐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차준홍 기자


EU의 관료주의와 탁상 행정도 불타는 농심에 기름을 부었다. EU 차원에서 '그린딜'(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달성) 정책이 도입되면서 ▶트랙터 등에 필요한 경유 가격 상승(보조금 중단) ▶살충제 사용 절감 ▶경작지 최소 4% 휴경 의무화 등의 규제가 추가됐다.

시위에 참여한 프랑스 농민 브누아 라퀘는 “우크라이나는 EU 회원국이 아닌데 면세로 수출해 우리에게 시장을 빼앗는데, 우리와 동일한 (환경) 규제 아래 생산하지도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급한 불' 컸지만 불씨 여전


프랑스 농민들이 지난 1일 프랑스 동부 오트마르샤임 도로를 트랙터로 막고 옆에 서 있다. AFP=연합뉴스

EU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1일 “EU 상반기 의장국인 벨기에와 함께 농가의 행정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 오는 26일 열리는 EU 농업이사회에서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전날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비한 대책도 내놨다. 관세 면세 품목에도 수입량이 많으면 관세를 부과하고 '최소 4% 휴경지' 의무화를 올 한해 면제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지난 1일 살충제 절감 계획을 보류하고, 농가를 위해 1억5000만 유로(약 2157억원)를 지원하는 대책을 내놨다.

프랑스 시위는 일단 진정 됐으나, EU의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폭발 가능성이 여전하다. 2일 독일 연방하원은 올해 예산안과 함께 농업용 경유에 대한 보조금 감축이 포함된 별도 법안을 의결했다. 상원에서 최종 의결될 경우 독일도 프랑스처럼 농민 시위가 확산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전례 없는 가뭄·홍수 등으로 작물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스페인 농민도 곧 시위에 나설 기세다.


6월 유럽의회 선거…극우 약진 디딤돌 되나

특히 유럽 농민들은 EU와 남미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MERCOSUR)간에 진행 중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협정이 성사되면 우크라이나에 이어 저가의 남미 농산물이 몰려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성난 농심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리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 등은 FTA 체결에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지만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찬성 입장을 고수하는 등 EU 내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탈리아 농부들이 지난달 30일 밀라노 근처 고속도로에 트랙터를 세우고 이탈리아 국기를 흔들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외신들은 이번 시위로 터져나온 유럽 농민의 불만이 EU의 정치 지형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주목하고 있다. 유럽 내 반이민 정서를 대변하며 세를 불려온 극우 정당들이 최근 성난 농심을 겨냥한 발언과 정책 제안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폴리티코는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프랑스·독일·네덜란드·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에서 극우 정치세력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약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유럽외교협회(ECFR)의 조사에 따르면 다가오는 선거에서 극우 성향 정당들이 9개국에서 제1당이 되는 등 의석을 크게 늘릴 것으로 예상했다.

유럽의회 선거의 유권자는 약 4억명으로, 약 2.3%가 농민(약 900만명)이다. ECFR의 케빈 커닝엄은 “농민들의 분노는 유럽 전역에 있는 극우 정당에 호재가 됐다”면서 “경제 문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극우엔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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