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나온 수만 군중 해산시킨 고종의 기만적 술책

이영천 2024. 2. 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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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 바라던 이들에 대한 답변... 나라는 무엇이며, 권력자는 어떤 철학으로 임해야 하는가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광화문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도 결국 경복궁을 중창하면서 흥선대원군이 그려낸 구한말의 얼굴 아닌가? 최근에 새로 단장한 광화문을 보고 있자면, 과거 아둔했던 고종과 표독스러웠으리라 짐작되는 왕후 민(閔) 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 광화문(1902)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나던 당시와 가장 가까운 시점의 광화문. 이 모습으로 복원이 추진되었다.
ⓒ 문화재청_보도자료
 
1893년 1월, 최시형(해월)은 왕이 교조 최제우(수운)를 신원해 주리라 믿고 3만여 교도에게 서울로 모이라 했을까? 서구 제국주의 야욕은커녕 이웃한 일본과 청나라의 속내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왕이, 힘없는 백성에게 베풀 알량한 아량이 남았으리라 생각했을까. 외부 강적에게는 비굴하고, 왕이란 자기 존재를 뒷받침해주는 백성에겐 한없이 가혹했던 아니 수탈 대상으로만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해월이 은택을 바라진 않았으리라, 애써 위무해 본다.

그렇다면 전봉준을 위시한 전라도 동학 남접은 광화문 복합상소를 어찌 보았을까? 해월의 한계를 먼저 보았을까, 아니면 썩을 만큼 썩어 망하기 일보 직전인 나라를 보았을까? 희미한 빛이라도 보였을까? 그도 아니면 희망 없는 나라를 송두리째 뒤엎을 명분을 찾고 있었을까?

궁궐 문 앞에서 내내 엎드려 곡을 하다

집회가 끝났어도 수많은 농민이 삼례 들판에 남아 농성한다. 교단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다. 수령과 관리들은 동학도를 잡아들여 수탈 대상으로 삼고, 집으로 돌아가 봤자 잡혀 갈 게 뻔한 탓이다. 교단도 난처하다. 하는 수 없이 대체 방안을 꺼내 든다. 궁궐 앞에서 엎드려 곡(哭)하며 임금께 호소해 보자는 복합(伏閤)상소다.
 
▲ 근정전 조선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공간 근정전.
ⓒ 이영천
 
해월의 보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1871년 경상도 영해에서 동학교단 전체를 들어 관아와 맞서다 궤멸적 타격을 입은 이필제 난을 겪고 난 후, 교단을 되살리려고 그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게 되면 한계가 명확히 보인다. '교단 보호'다. 현실의 질곡을 깨뜨려보겠다고 동학 전체를 들어 조정에 대항하는 행위는 절대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위험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시기상조란 명분으로 합법적 테두리를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접은 다르다. 공주와 삼례의 경험을 토대로, 현실 질곡에 힘으로 대항하려는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또한 억압받는 민중의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는 시급성도 인식한다. '후천개벽'이다. 이런 연유로 남접은 교단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지칠 만큼 지친 농민도 마찬가지다. 복합상소 때 서울에 간 3만여 농민은, 여차하면 일거에 조정을 무력으로 뒤엎자는 생각으로 길을 나선 이들이다.

하지만 남접은 제한적인 도발 행위로 분출하는 민중 요구를 누그러뜨리기로 한다. 역량 부족과 수구적인 한양의 분위기 때문이다. 또한 교단과 해월의 권위를 아직은 인정해야만 하는 한계도 안고 있었다.
 
동년(1892) 12월 6일에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장차 왕에게 직소하고자 할 때 우선 도소(都所)를 보은군 장내리에 정하자, 이때 사방 도인이 운집하여 각지 정보를 탐지하고 이어 글을 지어 정부에 보내니 그 내용은 …(중략)… 포덕 37년 계사(癸巳, 1893) 1월에 모든 도인이 보은에 크게 모여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조정에 직소하기를 청하였다. 해월 선생이 그 뜻에 따른다고 하자, 도인 수만여 명이 소(疏)를 들고 서울로 가 1월 9일 광화문 앞에 엎드려 소를 올리니 그때 대표는 박광호(朴光浩)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45~148에서 의역하여 인용)
  
▲ 촛불집회 당시 광화문 2017년 1월 촛불이 한창이던 눈내리는 광화문. 1893년 복합상소 당시도 이런 겨울이었다.
ⓒ 이영천
 
대표로 나선 박광호는 과묵하고 담대하여 해월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그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다. 대표로 나선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따라서 소장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탈당하는 백성 이야기는 없이, 동학이 사교(邪敎)가 아니라는 장황한 설명과 신원만을 요청하였다.

남접의 움직임, 전주 곳곳에 괘서가 나붙다 

광화문 상소에 남접, 특히 전봉준 등이 노린 것은 여러 가지였다. 신원과 무관하게 나라를 상대로 들고일어나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실천으로 옮긴다. 삼례집회처럼 대규모 군중의 힘을 재확인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복합상소 기간 삼례에 재집결한 농민 숫자에서 전봉준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서울에서 상소가 진행되는 동안, 전주 성내 장터를 중심으로 곳곳에 괘서(掛書, 나라에 반역을 도모하는 내용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내어 붙인 글)가 나붙는다. 이는 전봉준 등이 서울에 간 서인주·서병학과 모의하여 실행한 행동이다.

이에 놀란 전라감사 이경직이 조정에 '삼례 인근에 동학도 6만 명이 모여 서울로 진격하려 한다'는 전보를 보낸다. 남접의 이러한 움직임은 왕과 왕후 민 씨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질 만한 행위였다.
 
▲ 경복궁(2016) 의정부 터와 광화문을 위시한 경복궁 조감.
ⓒ 서울역사박물관
 
왕은 광화문 상소에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세자 탄생을 기념하는 과거시험이 열리던 서울엔 자연스럽게 수구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경직의 전보로 광화문에 모인 상소 무리를 하루라도 빨리 해산시켜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 결과는 광화문 앞에 모인 수만 군중을 철저히 기만하는 술책에 다름 아니었다.
 
소를 올린 후 도인들은 광화문 앞에 엎드려 3일 동안 통곡 애원을 했다. 13일에 사알(司謁: 조선시대 하급직)이 칙령을 받들고 구두로 "상소하는 격식은 사마표(司馬票)를 얻은 연후에야 제출할 수 있다" 말한다. 이에 상의하여 표를 얻고자 하였더니, 왕의 하교가 있었다고 하며 "너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각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그리하면 당연히 소원에 따라 처리하리라"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도인들은 깊은 생각 없이 그대로 흩어져 돌아가고 말았다. 조선 말에 조정공사(朝廷公事) 3일뿐이라는 말과 같이 왕명은 마침내 허언이 되고 말았다. 소원대로 하여 주기는 고사하고 관리의 침학(侵虐)은 점점 더 심하여 도인들은 편히 살 희망을 잃고 말았다. (앞의 책. p152~153 의역하여 인용)
 
당시 임금이 얼마나 권위를 잃었으면, 항간에 떠도는 말에 '조정공사 3일'이라 하였을까? 문서를 내리면 증거로 남는다. 그러니 아무 힘도 없는 하급직 사알의 주둥이를 빌어 하나 마나 한 말을, 엄동설한 3일을 꼼짝하지 않고 곡(哭)으로 상소한 3만여 백성에게 내뱉은 것이다.
삼례에 모인 수만 군중이 상경한다는 정보가 아니었다면 저런 허언이나마 하였을까? '백성들의 원성이 왜 저리 높을까?'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기대는 본디 난망이었다.
 
▲ 복원 전 광화문 복원하기 전 광화문
ⓒ 이영천
 
2008년 광우병 소고기에 분노한 시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늦은 밤 북악산에 올라 광화문에서 들려 온 '아침이슬' 노래를 들었다던 이명박 대통령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흉흉한 소문이 도는 한양

이때 서병학 중심으로 비밀리에 무장봉기가 논의되고 있었다. 상소 경과를 보아 적절한 시점에 조정을 전복시킨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때 한양은 축제 분위기다. 세자가 태어나 각종 연회와 행사가 벌어졌으며 도성 주민들에게 선물이 뿌려지던 시점이다. 과거에 응시하려는 지방 토호들이 시종 수십 명씩을 이끌고 와 수구세력 간 각축장으로 변해 있어, 서병학의 계획이 실현될 객관적인 여건은 아니었다.

복합상소 와중에 서울에서 괴상한 사건이 연일 발생한다. 상소가 해산되어 돌아가는 사람들을 한강 변에서 몰살시킨다는 흉흉한 소문에, 이를 경계하라는 벽서(壁書)가 도성 여기저기 나붙는다.

또한 곳곳에 '진인 정(鄭) 씨가 남해에서 나와 먼저 이(李)가와 민(閔)가를 멸하고, 다음에 왜놈과 양놈들을 몰아낸다'는 괘서가 나붙는다. 이 괘서로 한양 백성은 물론 외국인들까지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 일본공사관 1893년 당시 일본 공사관. 남산 자락에 있었으며, 나중 조선총독의 관저로 용도가 바뀐다
ⓒ 서울역사박물돤
 
상소는 흐지부지하였어도 괘서로 서울 장안이 흉흉하다. '왜놈 오랑캐들을 쫓아내고 권세 있는 자들을 없애버리자. 왜놈과 양놈들을 쫓아내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라는 내용에 일제히 3월 7일을 기해 공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주로 외국인 거주지와 일본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성당과 교회 등이 대상이다. 일본은 본국에 군함 파견을 요청하고, 종주국 행세하던 청나라는 군함 2척을 인천에 보낸다. 정작 당일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 사건으로 일본이 동학을 경계한 빌미가 되었을까?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나 개신교와 동학의 지위는 달랐다. 위 사건은 조선인이 세운 동학은 탐관오리들의 수탈 도구로 전락해 버린 한편, 외래 종교인 서학(기독교)은 나라 보호 아래 기득권으로 변모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관련 기사: 동학판 촛불 시위, 공주 '수운 최제우 신원 운동'). 한 맺힌 백성은 먹고사는 문제부터 이런 질곡과 역차별을 매우 절박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당시 광화문 복합상소 사건은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이며 권력자는 어떤 철학으로 임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통은 차치하자. 아둔함도 참아낼 수 있다. 독도가 영토분쟁지역이라는 권력에 과연 뭘 바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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