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정전... 여대 축제를 박수로 채운 권인하의 기지

강인원 2024. 2. 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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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강인원의 짜투리 평전] 록 보컬리스트 권인하

[강인원 기자]

80년대 초,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We'를 결성하여 음악활동을 시작한 권인하는 <슬픈 추억>, <오래전에>, <계절이 음악처럼흐를때>, <비오는날수채화>등의 히트곡을 가지고 있는 60대를 대표하는 록 보컬리스트이다.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를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 그는 2020년대에 들어서 '천둥호랑이'란 닉네임으로 대중들에게 확고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주 오래 전, 후배가수 문관철이 운영하고 있던 방배동의 '시나브로'란 록카페에서 음악 선후배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던 중, 그가 얼큰하게 한잔 걸친 상태로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고집 있게 밀어대는 그의 힘이 가득한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 마음대로 그를 파악해 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소리로만 살아왔던 나에게는 남달리 발달된 감지능력이 있다. 덕분에 그의 성질 불같음, 힘 좋음, 마음 약함, 남자다움 등이 내 술잔 앞에서 파헤쳐졌고, 싱싱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난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노래를 끝마친 그에게 나는 "인하야 내가 너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노래를 만들 자신이 있다"라고 말하며 정식 가수로 노래할 것을 권유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청년에서 가수로
 
 '천둥호랑이 창법'의 권인하(자료사진).
ⓒ 연합뉴스
 
당시 그는 그냥 취미로만 노래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던지 그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을 머금고 약간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떨림을 처음 보았던 순간이었다. 뭔지 모르게 어색하고 부끄러운 그의 떨림이 그의 순수함이라고 생각되자 갑자기 그가 좋아졌다.

권인하는 불같은 성격에 고집도 세다. 내가 그의 2집에 수록된 <계절이 음악처럼 흐를 때>, <가끔씩 생각하지>등의 노래를 작곡해 녹음을 할 당시 나는 조정실에 앉아 작,편곡자로서 그의 노래를 디렉팅하고 있었다.

"인하야, 다시 차분하게 기분을 좀 가라앉히고. 소리를 좀 담담하게, 응?"

보통 이렇게 말하면 "다시 해볼게요"라며 디렉팅 큐 멘트에 고분고분하기 마련인데 그는 달랐다. 대번에 조정실의 큰 스피커를 통해 성질 급한 그의 목소리가 버럭 터져 나온다.

"아~ 형 노래 좀 끊지 마요~! 내 기분대로 한번 해볼게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나는 그 순간 찍 소리 한번 못하고 또 한편 금세 마음이 상해 혼잣말로 "내 참 더러워서... 고집만 세 가지고...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하곤 스튜디오 콘솔 앞 스피커 밑, 긴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자는 척 딴청을 피웠다. 5분 쯤 지났을까? 그는 좀 전 자신이 내게 퍼붓던 말에 미안함을 느꼈던 건지, 내가 안 보이는 것에 불안해하는 것인지 노래하면서 유리벽 안쪽 조정실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의 귀는 더 쫑긋,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그의 노랫소리를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불쑥 나긋한 목소리로 "형 어때?"하고 날 달래듯 슬쩍 말을 걸어오면 난 언제 삐쳤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큐 버튼을 누르며 "좋은데? 많이 담담해졌어, 아주 좋아"하며 그의 마음 약함을 티끌하나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대 축제무대에서 생긴 일화
 
 공연 연습 한창인 권인하(자료사진).
ⓒ 연합뉴스
 
'비오는 날 수채화'의 히트로 김현식, 권인하 그리고 나는 여기저기 행사장에 불려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1990년 어느 날, 서울여대의 방송 가요제 축제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다. 정문을 들어설 때부터 여학교 특유의 향기로운 분위기와 꽃잎이 날리는 듯한 술렁거림에 남자 셋의 마음이 약간씩 들뜨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될 강당으로 걸어가는 길, 그의 넘치는 매력에 여대생들의 호기심이 모두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되고 10분 쯤 후 갑자기 정전이 됐다. 천여 명의 학생들의 "아~!"하는 안타까움의 탄성이 강당을 풀썩 들었다 놓았을 때, 권인하가 무대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여러분, 지금부터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마이크 없이 부르는 노래는 보너스입니다"라고 말한 후, 팝송이며 그의 솔로 애창곡들을 맨 목소리로 쌩쌩하게 불러대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은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댔고, 강당은 박수소리로 들썩거렸다. 그때 나서지 못했던 현식이와 나는 그저 무대 한편에 서서 권인하에게 싱거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내면에 생동하는 기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뮤지션이다. 귀를 간지럽히는 가사와 음성이 아닌 건강한 힘의 아름다움으로 인생과 사랑을 전하는 고집쟁이 뮤지션이다. 다만 힘이 넘쳐흐를 때 그의 깊은 곳 한쪽에서 그를 움직여야 할 그 무엇이 좀 더 강력하게 작용하여 그 힘의 간극을 조금씩만 조절해 주면 좋겠다는 우정 어린 생각을 해 본다.

"형 요새 어때?" 하고 물어보는 그를 보면서 그에게 약함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강한 선배 음악인으로서 서 있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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