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돌아갈래”…흐릿한 저화질 사진에 빠진 청년들
청년들, “고화질과 색 보정 기술에 피로감 느껴”
가성비보다 자기만족, 경험가치 중시하는 현상
# 직장인 이지수(30‧가명)씨는 2018년 구매한 아이폰 XS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DSLR 카메라처럼 사진이 선명하게 나오는 신형 아이폰보다, 필름 카메라처럼 동화 같은 색감의 아이폰 XS가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이씨는 “요즘 출시된 아이폰은 사진을 찍으면 색을 자동 보정해줘서 인위적”이라며 “아이폰 XS로 찍은 사진은 흐릿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라 요즘 추구하는 감성에 잘 맞는다. 새 휴대전화를 사더라도 색감 때문에 아이폰 XS를 서브폰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저화질 사진을 위해 구형 사진기를 찾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6년 전 출시된 아이폰부터 화소가 낮은 필름 카메라와 빈티지 디지털카메라(디카)가 인기를 얻으며, 전자기기는 최신형을 선호한다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최근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아이폰 XS를 비롯해 빈티지 디지털카메라, 필름카메라가 활발히 거래되고 있다. 아이폰 XS는 출시 6년이 지났지만, 현재도 20~45만원에 팔리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요즘 사람들이 감성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는 아이폰 기종’, ‘요즘 사람들이 아이폰 xs로 갈아타는 이유’ 등의 제목의 글이 올라온다. 최신형 아이폰의 색감을 비교하며 아이폰 XS 사진이 감성적인 톤을 연출한다는 내용이다. 댓글에는 “여행 갈 때 세컨드폰으로 가져간다”, “XS는 요즘 감성 그 자체”, “중고로 샀는데 셀카 찍을 때 다 내 폰으로 찍는다” 등의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이는 필름 카메라와 빈티지 디카 유행과 관련돼 있다. 2000년대 사용하던 디지털 캠코더나 디카로 찍은 느낌의 그룹 뉴진스의 ‘디토(Ditto)’ 뮤직비디오가 인기를 얻은 이후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말하는 ‘요즘 감성’을 종합하면, 일단 화질이 좋지 않아야 하고 노이즈로 경계가 불투명해도 따뜻함이 느껴져야 한다. 왜곡이나 부각 없이 내 눈으로 보는 장면을 그대로 담는 것이 핵심이다.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좋아”
1000만 화소 이하 빈티지 디카가 쏟아져 나왔다. 지난 1일 방문한 서울 인의동 세운스퀘어 한 카메라 가게는 중고 필름카메라와 빈티지 디카를 15~30만원대에 판매하고 있었다. 손님의 예산에 맞춰 국내부터 해외 브랜드까지 다양한 제품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카메라 판매 및 수리업에 종사하는 A씨는 “지난해 여름부터 젊은 손님들이 빈티지 디카를 찾고 있다. 노이즈가 심할수록, 화면을 움직여 셀카를 찍기 쉬울수록 인기가 많다”라면서도 “수요가 많아서 팔고 있지만 왜 인기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부러 저화질을 찾는 청년들이 기성세대에겐 잘 이해되지 않지만, 청년들에게 빈티지 디카는 일상을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하게 하는 도구다. 빈티지 디카를 수집하고 있는 정지은(32)씨는 외출할 때마다 항상 디카를 가지고 나간다. 번개장터, 중고나라, 당근마켓, 해외직구 등 다양한 곳에서 디카를 구매한다는 정씨는 “디카마다 가지는 색감이나 매력 등이 달라서 계속 모으는 중”이라며 “휴대전화로 찍는 사진은 다 비슷한데, 빈티지 디카만의 색감과 감성이 내 일상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설명했다.
빈티지 디카는 대부분 단종된 제품이라 중고거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서 빈티지 디카 시세는 5~30만원대로 형성돼 있다. 판매자들은 ‘레트로 빈티지 감성’을 내세워 “뉴진스 ‘디토’ 감성 빈티지 디카”, “현재는 엄청 구하기 힘든 모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구매자들은 주로 ‘1000만 화소 이하 저화질’을 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식이 오래돼도 상관없다. 옛날 감성 캠코더나 디카 정말 간절합니다” “은색 디카 1000만 화소 미만인 거 구해봐요. 5만원 밑으로 구해요” 등의 내용을 올렸다.
중고 제품 가격이 부담되는 청년들은 키즈 카메라, 레트로 카메라 등으로 불리는 2~3만원대 토이카메라를 이용한다. 중요한 건 기기가 아니라 빈티지 감성이기 때문이다. 빈티지 감성으로 찍은 저화질 사진은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기에 적합한 수단이기도 하다. 빈티지 토이카메라를 사용하고 있는 직장인 김예인(30·가명)씨는 “저화질로 찍은 사진이야말로 진짜 사진”이라고 정의했다. 요즘 최신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은 인위적으로 보정한 느낌이라 사람도 AI처럼 보이는 등 피로감이 든다. 김씨는 “화질이 너무 좋아 생생한 사진이 오히려 ‘내 추억 한 컷’ 느낌을 없앤다”고 말했다.
“가성비보다 추억이 더 소중해”
필름 카메라의 인기도 여전하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수입량이 줄어든 탓에 한 통에 3000원대였던 필름 가격은 현재 1만7000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비싼 필름 가격 때문에 필름 카메라는 구형 카메라 중 대표적인 사치재가 됐다. 그럼에도 청년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직장인 신아영(30‧가명)씨 “필름은 소중한 맛에 찍는 것”이라며 “가격이 오를수록 내 사진의 가치가 더 올라간다”고 말했다.
필름 카메라는 비싼 필름뿐 아니라 현상과 인화도 비용도 따로 발생한다. 필름을 인화하는 과정도 번거롭다. 가성비가 떨어지만 귀찮은 과정조차 추억이 될 수 있다. 신씨는 “휴대전화로는 사진 100장도 찍고 쓸데없는 것도 많이 찍지만, 필카는 소중하고 귀하다보니 한 장 한 장에 신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진짜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보정 없이 담아낼 수 있어 여행할 때 필름 카메라를 많이 찍는다”며 “사진을 찍고 인화하고 기다리는 순간까지, 모두 나의 소중한 기록이 된다”고 덧붙였다.
청년들의 구형 카메라 선호에 대해 전문가는 자기만족도와 경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청년들은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세대”라며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성세대의 눈에는 구형 제품을 사는 유행을 가성비가 떨어지고 소모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청년들에겐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만족도와 기쁨을 찾는 합리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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