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과 기리시마 사토시, 두 남자의 의외의 연결고리
[김종성 기자]
▲ 지난 1974년 11월 20일 고등법원 선고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대통령 저격범 문세광은 표정없이 사형기각 판결문을 듣고 있다. |
ⓒ 연합뉴스 |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지만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저격된 문세광 사건 직후에 한국 정부는 이를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사건 나흘 뒤에 나온 1974년 8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박 대통령 저격사건 수사본부 발표 전문'의 제1항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범인 문세광에 대하여 박 대통령을 암살하라고 지령하고 그 수행을 위하여 제반 수단방법을 제공한 배후는 북괴 함흥에서 김일성 지령에 의하여 일본 신사(新瀉)·횡빈(橫檳)·신호(神戶)·대판(大阪)의 항구에 왕래하는 조총련 직할 선박인 만경봉호의 북괴 공작지도원 명(名) 불상(50세 가량 앞머리 벗겨지고 마른 체격의 남자)과 재일 조총련 대판부(大阪府) 생야구(生野區)서부지부 정치부장 김호룡(40세 가량)이다."
한국 정부는 김일성 지령하에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요코하마·고베·오사카를 오고간 성명 불상의 북한 지도원과 조총련 오사카지부 김호룡이 문세광의 배후라고 발표했다. 이에 반해, 일본 정부는 자국 내에서 한국 반대 활동을 벌이는 한국청년동맹(한청)과 더불어 전년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문세광과 연관시켰다.
8월 17일 자 <매일경제> 3면 상중단은 "문(文)은 일정한 직업이 없이 막일을 하고 있었고, 김대중구출위원회와 한청에서 1개월에 4내지 5만 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는 일본 경찰의 수사 결과를 전했다. 일본 측에 의해 강조된 것은 문세광이 김대중을 살해하려 한 한국 중앙정보부에 분개해 김대중 응원 조직과 관련을 갖고 박정희 독재를 무너트리려 했다는 점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만 해도 박 정권과 일본의 관계는 지금만큼이나 좋았다. 한미일 군사동맹 이야기도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에서 밀린 미국이 1969년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 문제에서 한 발을 떼고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면서부터 박 정권과 미국 간에 냉기류가 형성됐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한국은 미·일로부터 왕따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1972년 2월 28일 미국이 중국과 상하이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동년 9월 9일 일본이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선언할 때에 한국만 패싱됐다. 한국은 20년 뒤 별도의 노력을 통해 중국과 수교했다.
그처럼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벌어져 일본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져 양국 관계가 험악해졌다. 그러던 차에 1년 뒤 문세광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가 문세광을 반독재 투사로 부각해 박 정권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문세광 사건 보름 뒤인 8월 30일, 박정희는 일본과의 국교중단 가능성을 시사했다. 미국이 급히 개입하지 않았으면 상황이 좀더 악화됐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문세광 사건을 북한과 연결시키려 하고 일본 정부는 재일한국인 단체 및 김대중 납치사건과 연결시키려 했지만, 이 사건을 전혀 다른 차원과 연결시키는 관점이 얼마 뒤 제기됐다. 요 며칠새 일본 언론에서 화제가 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연관시키는 시각이 그 당시 보도됐다.
▲ 기리시마 사토시(桐島 ?: 1954년 1월 9일-2024년 1월 28일) |
ⓒ CC0 |
금년 1월 25일 일본 경찰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조직원이자 지명수배자인 기리시마 사토시라고 주장하는 남성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신병을 확보했다. 말기 위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69세의 이 남자가 "나는 마지막이니 붙잡아 달라"며 병원 관계자를 통해 경찰에 자기 소재를 알린 결과였다. "내 이름으로 죽고 싶다"는 말을 남긴 이 남자는 29일 세상을 떠났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0년에 대학 서클로 시작해 2년 뒤에 이 이름을 갖게 됐다. 이들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를 깨트리고자 역사상 최악의 인간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에 맞섰다.
이 단체가 맞서 싸운 대표적인 주적은 지금의 강제징용 문제에서 자주 거론되는 전범기업 미쓰비시다. 이들은 문세광 사건 14일 뒤인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중공업 도쿄 본사에 폭탄 공격을 가해 8명이 희생되고 376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를 초래했다. 일본 왕궁(황거)으로부터 불과 800미터이고 야스쿠니신사로부터 도보 20분 거리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
1974년과 1975년에 이들은 미쓰비시 외에도 미쓰이물산·데이진중앙연구소·가지마건설·하자마구미 등을 공격했다. 문세광 사건 8개월 뒤인 1975년 4월 19일 발생한 도쿄 한국산업경제연구소 공격도 이들이 벌인 일이다. 이 연구소가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지원해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을 조장한다는 게 공격 명분이었다. 4월 19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은 4·19혁명을 일으킨 한국 민중에 대한 연대 의사의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한국 민중이 일본제국주의에 당한 것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당한 쪽은 일본 민중이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착취에 직접적으로 노출됐다. 일본제국주의의 주체는 일본 국민 전체가 아니라 대규모 자본가를 비롯한 소수 지배층이므로 일본 민중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했다.
▲ 1970년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일 일으킨 폭탄테러 사건을 보도하는 NHK 방송 |
ⓒ NHK |
그런데 이 단체가 벌인 초대형 사건 중에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것이 있다. 문세광이 박정희를 겨누기 하루 전날, 이들은 히로히토 일왕(천황)을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74년 8월 14일에 히로히토가 탑승한 열차를 폭파시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1926년에 즉위해 1930년대 및 194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총지휘한 히로히토를 공격하고자 했던 것이다.
1932년 1월 8일에 이봉창 의사는 히로히토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마차가 아닌 기차를 폭파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히로히토의 행선지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때 쓰지 못한 폭탄이 14일 뒤인 8월 30일의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에 사용됐다.
문세광과 동아시아무장전선의 관련성
문세광 사건 뒤에 일본에서는 일본 국가의 정점인 히로히토를 공격하려 한 반일무장전선이 한국 국가의 정점인 박정희를 공격하려 했던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1975년 6월 3일자 <경향신문>에 이런 내용이 보도됐다.
"산께이신문은 3일자 조간에서 일련의 기업 폭파 사건으로 체포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일당이 반한(反韓)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재일한국인 조직과 8·15 사건으로 처형된 문세광 및 문(文)의 여권 위조를 도와준 요시이 미끼코 등과 접촉을 했던 사실이 경찰의 조사에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일본 경찰이 이 단체 조직원인 아라이 마리코의 집에서 문세광 사진을 발견했다는 점도 이 기사에 보도됐다. 위 신문의 6월 16일자 7면 우상단에 따르면 문세광은 고등학교 3학년인 1969년에 폭력혁명고교전선에 가담했다. 이 시기에 그가 작성한 수첩 메모에는 얼마 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간부가 될 사람의 친형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세광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박정희 저격미수 사건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관련성이 집중적으로 규명돼야 마땅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박정희는 해방 이후의 한국 지도자 중에서 일본 지배층에 가장 협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단체가 박정희에게 반감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데는 한·일 양국의 정치적 사정도 한몫 했다. 한국 정부는 문세광의 배후에 김일성이 있다고 선전하고 싶어 했다. 일본 정부는 문세광 사건을 눈에 가시 같은 재일한국인 단체와 연관시키는 한편, 김대중 납치사건과 연관시켜 박정희 정부를 견제하고 싶어 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김대중이나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박정희 정권을 싫어했다. 이 단체가 볼 때는 김대중이나 박정희·김일성이나 오십보백보일 수 있었다. 이 단체는 일본 자본가들의 영향을 받는 한·일 양국의 지배체제 전체를 혐오했다.
이들이 1974년 8월 14일의 히로히토 암살미수뿐 아니라 다음날의 박정희 저격 미수에도 관여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이들이 한·일 양국의 수뇌를 거의 동시에 공격하려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문세광 사건은 남북 대결 혹은 김대중 대 박정희 대결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동아시아 민중 대 지배층의 대결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더 나아가, 미국 주도의 한미일 3각 체제에 대한 도전적 성격을 띨 수도 있다. 문세광 사건에 대한 전면적 재해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를 통해 문세광과 동아시아무장전선의 관련성 중에서 일부만 밝혀졌을 뿐이다. 양자의 연관성을 충분히 규명하려면 좀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문세광 사건이 동아시아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적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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