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필수의료 패키지' 10조 재원 어디서…"건보료 더 걷어야"
건보 적립금, 추가 지출 없이도 2028년 고갈 전망
의료계 "별도 기금 설치·운영해 국가적 지원 강화해야"
건강보험 적립금 고갈이 임박한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원안대로 시행하면 고갈 시점이 1년 이상 앞당겨진다는 주장이 나왔다. 의료계는 추가적인 재정 투입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며 우려를 표했고, 전문가들도 세부계획 수립시 건보 재정 건전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 대통령은 1일 경기 성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제8회 민생토론회에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발표했다.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는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혁신 전략 이행을 위해 필요조건으로서 의사 수 확대와 충분조건으로서 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패키지식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는 배경에서 추진됐다.
발표에 따르면 정부는 2035년 의사 수급이 1만5000명가량 부족할 것을 대비해 내년 입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해 나간다. '의대 지역인재전형 확대·계약형 지역필수 의사제 도입' 등으로 지역의료를 강화하고, 2028년까지 10조원 이상의 건보 재정을 활용해 필수의료 수가도 올리기로 했다. 강력한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대통령 직속의 '의료개혁특별위원회'도 신설한다.
의료계는 정부의 방향성엔 공감하면서도 건보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필수의료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성엔 공감하지만, 의료 현장에서 보기엔 독소 조항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며 "재정적인 부분 등 현실을 고려했을 때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어 "필수의료 지원을 위한 재정투입 계획 수립이 이뤄져야 한다. 기존 건강보험재정을 재분배하는 수준의 보상체계 조정이 아닌, 별도의 기금을 설치·운영하여 국가적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건보 적립금은 추가적인 지출이 없이도 고갈 위기에 빠져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25조2000억에 달했던 건보 적립금은 2028년이면 모두 고갈될 전망이다. 현행 제도가 유지되더라도 건보는 올해 1조4000억원 적자를 시작으로, 매년 수조원대 적자가 예상된다. 내년 3조2000억원, 후년 6조7000억원 적자를 시작으로 2032년엔 적자만 20조원에 달한다는 분석이다.
이같은 상황에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가 시행될 경우 고갈은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의사 정원 확대가 이뤄질 시 건보 재정 건전성은 직격탄을 맞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07년 '국민의료비 지출구조 및 결정요인에 대한 국제비교'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1명이 늘어날 경우 1인당 의료비는 159달러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는 이를 국가별 보험 제도와 의사의 근무형태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통계학적으로 계산할 시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1명이 증가 시 사회의 의료비 총지출은 약 22%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의료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에 따른 '공급자 유인 수요' 때문이다. 의료서비스 공급자인 의사가 전문 지식과 정보 면에서 우월하므로 수요자인 환자의 의사결정을 대신하게 되는 점에서 일반시장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봉식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은 "심각한 건보재정 파탄이 시한폭탄처럼 예고된 상황에서 의사를 대폭 늘리면 건보재정은 더 일찍 바닥나고 결국 건보료 인상 폭탄을 터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패키지의 핵심인 의대 증원 규모는 건보 재정을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의료는 공급이 수요를 불러일으키는 시장이다. 의사 수 증가는 건보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선 의대 증원을 최소화하고 그 재원을 필수의료 수가 조정에 활용하는 방안 등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김원식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건강보험 운영시스템에서 의사의 증가는 병·의원 간의 경쟁으로 이어져 과잉진료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결국 건강보험 지출 증가로 이어진다"며 "의대 증원 문제는 미시적으로 접근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수의료 수가 인상에 10조원 이상의 건보 재정을 쓰는 방안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된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현재 추세로는 건보 추가 지출항목이 생기지 않아도 적립금이 2027년 5조가량만 남게 된다. 필수의료 수가에 적립금을 추가 지출하면 고갈 시점이 1년 이상 빨라지고, 누적 적자 규모는 눈덩이가 될 것"이라며 "10조원을 더 쓰겠다는 말은 그만큼 국민에게 건강보험료를 더 걷겠다는 말과 같다. 건보 관련 정책은 하나하나가 의료계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조 교수도 "필수의료 수가를 높이는 방향성엔 공감한다. 다만 건보 재정 건전성을 고려해 다른 부분의 지출 조정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감기 등 경증에 있어 본인 부담금을 100% 가까이 높이는 등 새는 돈을 막아야 한다. 본인부담금이 커지면 경증으로 상급 종합병원을 찾는 환자도 줄 것이고 불필요한 건보 지출도 줄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정부는 건보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현재 건보 누적 준비금이 약 24조원이고, 2022~2023년 연속 약 3조원 규모의 당기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위해 일부 MRI·초음파 건강보험 급여 범위를 축소하고 과다의료 이용자의 본인 부담 비율을 높이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4일 제2차 건강보험종합계획(2024~2028) 브리핑을 통해 건강보험 재정 추계와 지속 가능성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최태원 기자 peaceful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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