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절제 없음 경계하지 않으면 하나님 주신 능력에도 실족해”
윤만호 EY한영 경영자문위원회장
윤만호 EY한영 경영자문위원회장(69·치유하는교회 은퇴 장로)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 50년 가까이 지켜온 삶과 신앙의 표어가 있다. ‘기대하고 기도하면 준비하게 하시고, 준비하면 반드시 이뤄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윤 회장은 불안과 염려가 가득하고 열등감 때문에 우울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꿈꾸며 기도하는 청년으로 거듭났다.
윤 회장은 “하나님은 삶의 최고 카운셀러”라며 “실패하고 좌절할 때마다 찾아오셔서 포기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또 저를 리셋해 주신다”고 고백했다.
윤 회장은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탓에 평생 불편한 다리와 함께하고 있다. 예방접종도 없던 시절 어느 날 감기에 걸렸는데 잘 낫지 않다가 기침은 그쳤는데 일어서질 못해 병원에 갔더니 소아마비였다. 당시 27세였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을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1시간도 넘게 걸리는 한의원에 거의 매일 걸어 마사지 치료를 받게 하셨다. 윤 회장은 “어머니는 항상 제가 정상인과 똑같은 정당한 경쟁을 하도록 늘 교육하셨다”면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가족의 `응원으로 별 구김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고 윤 회장이 가진 장애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집안 식구 누구도 교회에 다니지 않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관심을 끌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경복고 2학년 때 방과 후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종교반을 선택한다. 윤 회장은 “처음 성경을 접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였다”면서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나오신 젊은 간사님의 명쾌한 성경 해설과 말씀에 매료됐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윤 회장은 가끔 친구를 따라 학교에서도 가깝고 집에서도 멀지 않았던 새문안교회를 찾기도 했었지만 교회를 정해 놓고 출석하지는 않았다.
외교관을 꿈꾸던 윤 회장은 원하던 서울대 외교학과 진학에 실패하면서 큰 실의에 빠진다. 재수 기간 대부분은 공부는 뒤로 한 채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맘을 잡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1학년 1학기 교양수업은 수시로 빠졌다. 윤 회장은 “당시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의 생활을 했다”고 전했다. 2학기가 시작하고 채플 시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동네 교회에 다니면서 새벽기도도 시작할 무렵이었다. 백낙준 당시 연세대 명예총장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윤 회장은 “하나님은 강당에 모인 그 많은 학생 중에 유독 저에게 오셔서 말씀을 퍼부어 주셔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회개하고 결단하게 해 주셨다”면서 “지금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 계획을 갖고 나를 미션 스쿨인 연세대로 인도하셔서 만나 주신 건데 당시에는 도무지 알 리가 없었다”고 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윤 회장에게 찾아온 변화는 놀라웠다. 그는 “우선 학교생활에서 생기를 되찾았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꿈꾸고 있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를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기 시작했다”며 “불안감이나 열등감을 쫓아내고 꿈을 꾸며 기도하기 시작한 삶의 루틴이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신앙이 한 차원 성장한 계기를 묻자, 주저 없이 “신앙심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이라고 답했다. 바로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미팅에서 만나 첫눈에 반해버린 예쁘고 믿음 좋은 여자 친구로, 지금의 아내 이강숙 여사다. 하지만 당시 엄격한 유교적 전통 속에 가끔 절에도 다니시던 어머니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어머니는 고민하는 아들을 불러 “한 집안에 두 종교는 안 된다”며 “내가 너를 따라 교회를 나갈 테니 교회를 정해 다오”라고 말했다. 윤 회장은 “이날 어머니의 음성이 5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면서 “어머니의 이 결단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정해준 집 근처 화곡동교회(현 치유하는교회)에 등록했고, 교내 루스채플을 다니던 윤 회장과 예비 며느리도 졸업 후 화곡동교회로 옮겼다.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던 두 사람은 1980년 결혼했다.
결혼 후 윤 회장은 집과 직장, 교회를 오가는 단순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드는 것도 목표였고, 직장생활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게 과제였지만 아무리 바빠도 내 마음속 중심의 최우선 순위는 믿음 지키기에 뒀다”면서 “지금 와서 보니까 믿음이 가정도 지켰고 직장도 지킨 숨은 비결이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술 한 모금, 담배 한 대도 피지 않으면서 현재까지 45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이어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윤 회장은 신앙인으로서 직장에 파송된 선교사라는 생각으로 직장 생활의 고난을 이겨냈다. 그는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궂은일은 피하고 무슨 일 생기면 교회 가야 한다고 빠지는 게 너무 싫었다”면서 “주위에서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일하냐, 겸손하냐, 헌신적이냐’고 물으면 ‘나 때문이 아니야, 내 마음속에 계신 분 때문이야’라고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윤 회장의 또 다른 버팀목은 직장 생활 내내 늘 함께한 신우회였다. 그는 “직장의 일상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 도전을 주고, 위로와 격려를 나누었던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에서 승승장구하던 윤 회장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 2000년 3월 뉴욕지점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인생 최대 위기를 맞는다. 부임하자마자 미국 감독 당국의 감사를 받으며 지적사항이 108개 항목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런 가운데 회의록 허위 작성 이슈까지 터져 사무실 PC를 모두 압수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회의록 작성을 허위로 한 기관이 재무제표 작성은 옳게 했겠느냐는 이유였다.
1년도 넘게 매일 야근이 이어졌다. 당시 중2, 고1이었던 두 아들과 아내를 잘 돌보지도 못하면서 직장은 물론 가정도 편치 않았다. 스트레스와 함께 오랜 시간 과로로 인해 급기야 심장에 문제가 생겨 시술까지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석하던 뉴저지초대교회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주부터 교회에서 중보기도학교가 10주간 열리는데 꼭 참석하시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형편상 어렵다고 말했지만 목사는 주일에도 그다음 주에도 거듭 설득했고, 중보기도학교가 열리던 당일에도 다시 전화를 걸어 “문제가 심각할수록 문제 속에 있지만 말고 문제 밖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 문제를 다 풀어 주신다”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결국 윤 회장은 목사님의 강권에 정말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정을 쪼개서 중보기도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을 위해, 교회를 위해,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뿐인데 중보기도 학교가 끝나고 나니 우리 지점과 미국 감독 당국과의 관계가 눈 녹듯이 풀어졌어요. 기도 한마디 안 나오게 어려울 때나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을 때 저는 하나님의 강권으로 중보기도를 시작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첫 기도학교를 마칠 때 눈물로 간증했던 윤 회장은 이후 중보기도학교에서 헌신자로, 운영자로 봉사했고 3년 6개월의 뉴욕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는 중보기도학교장이었다.
윤 회장이 그동안 붙들고 살았던 말씀은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였다. 그는 “믿음 생활을 하고 나서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고 고난을 주신 이유가 육체의 가시를 통해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면서 “장애는 다소 불편하지만 불편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응답 주시기 때문에 장애는 진짜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60세가 넘어 인생을 되돌아보는 지금의 윤 회장을 지켜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이다. 특히 윤 회장이 강조하는 것은 ‘절제하는 마음’이다. 그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절제”라며 “절제 없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에도 실족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평생을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배웠다”는 그는 “앞으로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선교하고 치유하며 나누고 베풀고 사는 이타적 사랑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은퇴 후 소박한 꿈 중의 하나는 평생을 금융인으로 살아왔던 만큼 농촌에 살면서 경제금융 교육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무료로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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