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을 소개합니다
[박태신 기자]
▲ 카페 '파랑돌'의 창가 풍경. 인천항 너머 터지기 직전 홍시 닮은 석양을 볼 수 있는 곳. |
ⓒ 박태신 |
29일 월요일, 지인의 초대로 동인천 답동과 자유공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천 토박이인 지인은 등산용 스틱을 짚고 동인천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동인천으로 가기 위해 이른 출근 시간 때 북적이는 지하철을 탔다. 대신 두 시간 지나 내릴 무렵 열차는 텅 빈 공간의 한가로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 다큐 <보는 것을 사랑한다> 포스터. 극장 이름 ‘애관'(愛館)을 활용해, 사전에 없는 동음이의 한자어 '愛觀'을 만들어 한글 제목 옆에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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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89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 극장 겸 무대인 애관극장으로 향했다. 골목길엔 소박함과 예스러움이 풍겼다. 애관극장에서 조조 티켓 금액(1인당 6천원)을 내고 <서울의 봄>을 관람했다. 웰메이드 영화다. 소심한 장성들이 극악무도한 한두 장성의 위력에 눌려 잘못된 선택을 해나가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다.
반란의 역사를 스크린으로 접한 관객들이 분통이 터져 스트레스를 잔뜩 받기도 한다는 영화를,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지고 한국 현대사와 맥을 같이 해온 극장에서 관람했다.
▲ 답동성당. 정식 명칭은 천주교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성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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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답동성당으로 향했다. 1897년에 지어진 본당 건물은 주변에 지어진 건물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있기도 하지만, 예전엔 사방에서 보이는 노아의 방주 같은 곳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드넓은 언덕의 답동성당 마당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우리는 마당 한편에서 마음에 와 닿는 성서 한 구절을 발견했다. 길쭉한 철제 푯대에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향유와 향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친구의 다정함은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성경 잠언 구절이다. 지인과 나는 글과 대화를 통해 서로 그런 기운을 주고받곤 한다.
▲ 삼양주. 나는 이 삼양주를 한국-사우디아라비아 축구경기를 보며 홀짝홀짝 마셨다. 애간장 타는 가슴을 달래준 삼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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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삼양주를 플라스틱 병에 담아 와 나에게 선물로 건넸다. 다른 병에 소량으로 담아 온 삼양주는 반주로 나눠 마셨다. 한 번 빚을 때마다 도수가 6도씩 올라간단다. 진득하고 찰진 맛이 났다. 된장, 고추장이든 술이든 맛있게 만드셨다는 어머니의 손맛을 자신도 물려받았으리라 믿으면서 손수 만들어보았다고 한다.
영화세트장 느낌의 거리를 걷다
▲ 산당화. 따뜻한 실내에서 보살핌을 받아 일찍 꽃을 피운 것 같다고 지인이 알아봐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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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꽃잎이 다섯 장, 암술 수술 구분이 잘 안 되는 꽃술이 마치 찻잔 모양의 수선화 부관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길가에서 명자나무는 자주 봤어도 양반집 내당 같은 공간에서는 처음 본다. 명자꽃보다는 산당화라는 명칭이 기품 있어 보여 더 좋다. 괜히 도자기 옆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산당화의 별칭이 '아가씨나무'다.
지인은 내게 보여주고 싶은 곳을 가기 위해 자유공원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도 서슴지 않고 올랐다. 그 뒤엔 인천항의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카페 '파랑돌'로 안내했다.
나는 에스프레스 샷 추가를, 지인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그런데 에스프레소를 두 잔 가져다준다. 지인이 단골이어서 그렇기도 했겠고, 프랑스 프로방스 여행 경험으로 카페 이름을 지었다며 직전에 주고 받은 짧은 대화가 좋아서 그랬기도 했겠다 싶다.
널찍한 공간에 서향 창 앞에 무수한 꽃들이 나름의 서식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주인장은 일부러 창 주변의 조명을 어둡게 했는데 덕분에 새가 그려진 한지등이 야경 속 따스한 모닥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카페 안이 어둑신해질 때까지 지인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간은 대화를 좌우한다. 동인천 구석구석의 역사적인 곳, 밥집을 차려주는 식당, 모던한 카페 그리고 늘 바닷바람에 노출돼 소금기 어린 거리들... 지인은 저녁으로 갈비탕을 대접하고 역시 동인천역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느린 보폭으로 걸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온종일 동인천 나들이였다.
종일 구경한 동인천은 내게 '보는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이다. 극장에선 영화를, 성당 마당에선 때마침 어울리는 성서구절을, 식당에선 곤로와 김치찌개와 삼양주를, 카페에선 운치 있는 풍경을 보았다. 그런 대상을 보는 것이 사랑스럽다. 지인의 정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서울에서 동인천 왕복 네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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