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이성진 감독 “작품엔 여러 사람의 경험 녹아있다”

정진영 2024. 2. 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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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중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성난 사람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건 캐릭터들 안에서 각자 자신의 일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내 어둠을 남에게서 볼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런 게 많은 분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비프)을 연출한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감독은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에미상 수상은) 너무 좋았다.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내 동료들, 그리고 그간 존경해왔던 예술가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너무나 뜻깊은 일”이라며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됐고, 내가 처음에 시작했을 때 어땠는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수상 이후의 소회를 밝혔다.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에미상 시상식 이후 진행된 에프터파티에서 스티븐 연(왼쪽)과 이성진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Getty for Netflix


‘성난 사람들’은 TV 시리즈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미국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작품상과 감독상, 작가상, 남녀주연상 등 8관왕에 올랐다. 이밖에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과 남녀주연상을, 크리틱스초이스 시상식에선 작품상과 남녀주연상에 더해 여우조연상(마리아 벨로)까지 수상하며 지난해 최고 작품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 감독과 주연배우인 스티븐 연은 2일 진행한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에미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비롯해 작품과 관련한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수상을 예상했는지 묻자 이 감독은 “항상 나를 괴롭히는 자기 의심과 고삐 풀린 나르시시즘의 교집합이 예술이라고 하더라. 저도 그 양쪽을 오간다”며 “어느 날은 아무도 우리 작품에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어느 날은 우리가 모든 상을 탈 거라는 기분이 드는데, 그 중간 어디쯤의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고 답했다.

스티븐 연은 “(수상을) 예상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길 희망할 뿐”이라며 “다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도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해주셔서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중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성난 사람들’은 마트 주차장에서 대니(스티븐 연)와 에이미(앨리 웡) 사이에서 일어난 사소한 시비가 극단적인 싸움으로 치달으며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블랙 코미디 드라마다. 각 인물에게 쌓인 울분과 무력감, 스트레스 등을 코믹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담아내 호평받았다.

작품에는 한국 이민자들의 일상이 사실적으로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계 이민자의 자녀인 대니가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할 때 카카오톡을 쓰는 장면이나 한인교회에서 한국계 이민자들과 교류하는 장면, 가전은 LG라며 새로 지은 집에 LG 제품을 들이는 모습들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촬영 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성진 감독(왼쪽)과 스티븐 연. 넷플릭스 제공


이런 장면은 이 감독 본인의 경험뿐 아니라 제작에 참여한 한국계 제작진들의 경험이 한데 모여 만들어졌다. 이 감독은 “굉장히 많은 사람과 계속해서 대화한 결과물”이라며 “저와 스티븐 외에도 작가들의 여러 경험들, 저희가 나누는 수많은 대화를 통해 모든 게 한데 모여서 그 누구도 정확히 경험하지 않은 제3의 것으로 변화해 작품에 녹아들었다”고 설명했다.

스티븐 연은 무슨 일을 해도 잘 안 풀려서 무력감을 느끼다 그렇게 쌓인 울분을 엉뚱한 곳으로 분출해버리고 마는 대니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표현해내 호평을 받았다. 그의 연기에는 한국계 이민자로서 자신의 경험도 녹아들었다. 스티븐 연은 “이민자의 현실이라는 건 제가 직접 겪어서 잘 아는 게 컸다”며 “삶에서 참고할 다양한 인물은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함께 얘기하다 보니 비슷한 사람들이 많더라. 결국 공통적으로 겪고 공유한 경험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중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그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대니를 연기하는 게 힘들기도 했다’고 털어놨었다. 스티븐 연은 “대니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여러 모습의 수치심을 집약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몹시 무력하고 통제력이 없는 인물”이라며 “그런 대니에 녹아들어야 해서 힘들었지만, 대니를 포기하는 건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거란 생각이 들더라.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수용 받는 것 아닌가 싶었다”는 생각을 밝혔다.

작품의 전면에서 다뤄진 건 아니지만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고민은 작품 전반에 묻어있었다. 이는 이 감독 자신의 고민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이 감독은 과거 미국 이름 ‘소니 리’(Sonny Lee)로 활동했었는데, 박찬욱·봉준호 등 세계적 감독의 이름을 미국인들이 정확히 발음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현재의 한국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늘 그런 주제를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지만 제 존재 자체에 깊이 박혀있는 것 같다”며 “(그 고민은) 제가 앞으로 내놓을 작품에도 담겨 있을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영화 안에도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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