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알면, 맥주 색깔만 보고 맛 구별할 수 있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맥주는 다양한 재료들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술입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문화를 타고 이어오고 있습니다. 수천 가지 맥주도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맥주 재료가 양조사를 만나 맥주로 바뀌는 과정을 풀어봅니다. <기자말>
[윤한샘 기자]
▲ 메소포타미아 맥주 재료의 양을 표기한 설형문자, 국립중앙박물관 |
ⓒ 윤한샘 |
계절별 온도 변화가 큰 메소포타미아의 지중해성 기후는 종의 다양성을 넓혀 다양한 식물군을 조성했다. 보리와 밀은 적은 강수량과 서늘한 기온에도 생존했고 풍부한 전분과 단백질을 갖고 있었다. 인류는 보리와 밀 덕에 높은 출생률을 누렸고 도시 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곡물 발효주, 맥주는 자연이 아닌, 문명의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초창기 맥주는 술이 아니었다. 음식과 음료에 가까웠다. 물보다 안전해 배탈이 나지 않았고 에너지 덕분에 힘도 났다. 초기 맥주에는 다양한 곡물들이 사용되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작물화한 식물은 보리와 에머밀, 외톨밀, 렌즈콩, 완두콩, 병아리콩, 쓴살갈퀴, 아마, 총 8개였다. 이중 맥주의 여신, 닌카시가 허락한 맥주 재료는 보리와 에머밀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생보리와 밀에서는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당시 보리와 밀이 맥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빵이나 곡물죽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생 곡물에서 술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를 알기까지는 수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 효소를 처음 발견한 앙셀름 파엥 |
ⓒ 위키피디아 |
효소는 생명체 속의 화학반응을 짧은 시간 가능하게 하는 단백질 촉매제다. 만약 효소가 없다면 우리 몸에 들어온 음식은 몇 달 뒤에야 영양분으로 전환될 것이다. 빛 에너지를 포도당으로 바꾸는 광합성이나 당을 에너지 삼아 발효하는 효모도 효소 덕에 가능하다.
아밀레이스는 전분을 당으로 잘라주는 효소다. 전분은 포도당의 결합체다. 밥을 씹으면 단맛이 느껴지는데, 이는 침 속에 있는 아밀레이스가 쌀 전분을 당으로 분해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에 흡수된 당은 산소와 반응하여 에너지 물질인 ATP를 생성한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효소의 도움으로 목숨을 영위하고 있다.
전분 가수분해효소 아밀레이스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적정 온도와 물이 필요하다. 아밀레이스는 알파와 베타로 나뉘는데, 알파(α)-아밀레이스는 섭씨 70도 정도 물에서 전분을 마구잡이로 분해하는 반면 베타(β)-아밀레이스는 60도 정도에서 포도당이 두 개씩 결합한 맥아당으로 잘라준다.
전분은 아밀레이스의 활약으로 단당류 포도당, 이당류 맥아당과 설탕 그리고 다당류 덱스트린으로 바뀐다. 이중 효모가 먹을 수 있는 당은 포도당, 설탕, 맥아당이며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맥아당이다. 당이 네 개 이상 결합한 덱스트린은 소화하지 못한다. 하지만 맥주에 남아 단맛과 바디감을 형성한다.
▲ 보리 |
ⓒ 윤한샘 |
보리와 밀은 다량의 효소를 품고 있다. 다른 곡물을 제치고 보리와 밀이 맥주 재료의 왕좌를 차지한 결정적 이유다. 일례로 자체적인 효소가 부족한 쌀은 맥주가 될 수 없다. 누룩곰팡이 또는 추가적인 효소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보리와 밀에 효소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 때나 움직이지 않는다.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생보리와 밀을 또 다른 존재, 맥아(malt)로 바꿔야 한다. 맥아는 싹이 튼 곡물을 건조시킨 것을 의미한다.
보리와 밀이 효소를 갖고 있는 것도 생존을 위해서다. 적절한 온도와 수분을 공급하면 효소는 잠에서 깨어 전분을 당으로 바꾼다. 보리는 이 당을 에너지로 활용하며 싹을 돋우고 뿌리를 내린다. 맥주를 원한다면 보리 싹이 보일 때 '멈춰'를 외쳐야 한다. 가만두면 전분과 효모, 모두 사라지고 말 테니까.
싹을 틔우는 과정에서 활성화된 효소를 잠시 멈추기 위해서 진행하는 방법이 건조(kilning)다. 열을 가해 수분이 사라지면 효소는 비활성화된다. 그러나 적정한 환경만 조성되면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 보리 맥아는 효소를 품고 있는 건조 곡물이다.
맥주 양조사들은 맥아를 분쇄해 따뜻한 물에 넣으면 당물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선조들도 엿기름이라는 이름으로 식혜를 만들었다. 이렇게 전분이 당으로 바뀌는 과정을 당화(생화학에서는 saccharification, 맥주에서는 mashing)라고 한다. 효모는 당화를 거쳐 나온 당물, 즉 맥즙(wort) 속 당을 먹으며 환경에 따라 호흡과 발효를 진행한다.
그렇다면 밀은 왜 맥주의 주재료에서 밀려났을까? 밀도 보리와 같이 다량의 아밀레이스를 갖고 있다. 양조사들이 맥주의 주인공으로 보리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껍질에 있다. 보리 맥아는 단단한 껍질을 갖고 있는 반면, 밀 맥아는 껍질이 없다.
맥주는 액체다. 양조사가 원하는 것은 불순물이 최대한 섞이지 않은 맥즙이다. 분쇄된 보리 맥아 껍질은 필터가 되어 맥즙을 깨끗하게 걸러주었다. 껍질이 없는 밀 맥아는 질척한 진흙처럼 쌓여 효율적인 맥즙 분리를 방해했다. 게다가 밀에 들어있는 다량의 단백질은 맥주를 탁하게 했다. 맥주 색이 밝아지고 투명해질수록 밀은 양조장 창고에서 사라져 갔다.
▲ 보리맥아 |
ⓒ 위키피디아 |
맥주 양조 기술이 진화되면서 재료와 양조 분야는 각각 전문화됐다. 수확한 보리를 맥아로 만드는 사람을 몰스터(malster)라고 한다. 보리는 크게 두 줄 보리와 여섯 줄 보리로 나뉘는데, 맥주에는 알곡이 큰 두 줄 보리가, 식용으로는 여섯 줄 보리가 사용된다. 몰스터는 맥주 보리를 맥아로 바꾸는 것 외에 로스팅을 통해 다양한 색을 입히는 작업도 수행한다.
밝은색 맥아는 건조를 통해 생성된다. 효소 활성도와 당화율이 높아 주로 효모의 먹이가 된다. 기본 맥아(base malt)라고 하며 보통 전체 맥아 사용량의 80~100%를 차지한다. 맥주의 알코올은 기본 맥아량에 따라 결정된다. 알코올 도수를 올리고 싶다면 더 많은 기본 맥아를 넣으면 된다. 효모의 배를 빵빵하게 채워주면 답례로 풍부한 알코올이 돌아온다.
▲ 브루펍 맥주들 |
ⓒ 윤한 |
맥아 색은 숫자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무모해 보이는 일을 시작한 사람은 19세기 영국 출신 맥주 양조사 조셉 윌리엄스 로비본드다. 그는 맥주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안으로 맥주 색을 떠올렸다. 같은 맥주라면 색도 항상 동일해야 했다. 1880년 로비본드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다가 유리를 활용해 색을 측정하고 기준을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결과 로비본드 색도계(Lovibond Tintometer)가 탄생했다. 로비본드는 맥주에 빛을 투과시킨 후, 20가지 색을 입힌 유리와 비교했다. 그리고 각각의 색에 숫자를 붙였다. 색을 숫자로 치환한 것이다. 이후,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코팅 유리를 조합할 수 있는 장치로 업그레이드하며 정확도와 스케일을 넓혔다. 색도계는 맥주뿐만 아니라 모든 액체의 색을 판별하며 광학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때 나온 색 측정표를 로비본드 스케일(Lovibond color scale)이라고 한다.
로비본드 스케일은 맥아와 맥주의 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됐다. 숫자 뒤에 'L'이 로비본드 스케일임을 알려준다. 가장 밝은 색은 1L, 가장 어두운 색은 40L 이상으로 표시한다. 양조사는 로비본드로 표시된 숫자만 보고, 맥아와 맥주 색을 파악할 수 있다.
한 세기 이상 애용되던 로비본드 스케일은 20세기 들어 SRM(Standard Reference Method)으로 바뀌었다. SRM은 분광기를 통해 측정된 값을 기준으로 표시한 수치로 가장 밝은 색은 1, 가장 어두운 색은 40을 나타낸다. 또 다른 스케일은 EBC(European Brewery Convention)로 주로 유럽에서 사용한다. 같은 색 범위를 1부터 80으로 구분하며 SRM에 약 1.97의 곱과 같다. 19세기 제정된 로비본드 스케일이 현재의 SRM과 크게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 제맥과정 중 맥아를 건조시키는 모습 |
ⓒ 위키피디아 |
맥주 색이 어두워질수록 향은 고소하고 짙은 흔적을 남긴다. 황금색을 띠는 필스너는 흰 빵 같은 향이 묻어 있다. 앰버 색의 페일 에일은 건포도, 메르첸은 캐러멜을 갖고 있으며 마호가니 색의 둔켈은 감초, 스타우트는 커피와 초콜릿을 내보인다. 검정색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다크 초콜릿과 비스킷 향을, 콰드루펠은 건자두 향을 드러내며 자신을 어필한다. 맥주 스타일에 따라 달라지는 맥아 향은 맥주를 즐기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태곳적 맥주는 마술인 반면 지금의 맥주는 과학에 가깝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효모와 효소 그리고 전분과 당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술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전분을 당으로 자를 수도, 당을 알코올로 바꿀 수도 없다. 그저 작은 마법사들이 놀라운 일을 하도록 도와줄 뿐이다. 술은 이렇게 인간과 자연이 합을 이뤄 탄생한다. 그래서 좋은 양조사는 항상 겸손하다.
좋은 술은 겸손과 감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애주가들도 알았으면, 한 잔의 술에 놀라운 마술이 들어있음을 이제라도 깨달았다면, 맥주를 즐길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중복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글로벌 왕따로 전락한 한국 증시, 앞으로가 더 두렵다
- '사직-사직구장' 정정보도 신청...한동훈에게 언론이란 무엇인가
- [이충재 칼럼] '김건희 명품백' 사과를 애걸하는 나라
- 물길 따라 늘어선 비석들... 낙동강 여행하면 마주하는 슬픈 흔적
- 올해 이른 여름휴가는 여기입니다, 저장하세요
- '문제행동 반려견', 한국에 유독 많은 이유
- 윤 대통령 지지율 29%... 이태원특별법 거부 여파
- "연합정치로 '거부권 거부연대'... 민주당이 선도해야"
- 연동형·병립형 선택 앞둔 민주당, 지지층은 오차범위 내로 갈렸다
- [오마이포토2024] "전쟁 부르는 접경지역 군사훈련-대북전단 살포 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