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반도체의 모든 길은 Arm으로 통한다
노키아 휴대전화·애플 스마트폰
모바일 혁명 이끈 보석 같은 기업
AI의 두뇌로 빅테크 변화 이끌어
2022년 8월 당시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했다. 펠로시 의장은 지난 25년간 대만을 방문한 미국 인사 중 최고위급이었다. 중국은 자국 영토라고 생각하는 대만에 미국 고위 관계자가 입국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은 대만 포위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무력 시위에 나섰고 양안과 미·중 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Arm, 모든 것의 마이크로칩(원제: The Everything Blueprint)’의 저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당시 미국과 중국이 대치한 이유로 반도체를 언급하며 대만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TSMC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 과학, 군사, 우주 개발 등 여러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으며 반도체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TSMC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 매우 중요한 업체다. 펠로시 의장과 당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오찬 때 TSMC의 마크 리우 회장과 모리스 창 창업주가 함께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중국은 큰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제목에 쓰인 마이크로칩은 책에서 반도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반도체 중 프로세서 등의 시스템 반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는 반도체가 오늘날 지정학적 갈등의 궁극적인 목표가 돼버렸다며 마이크로칩 공급 갈등에 새로운 냉전이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책을 저술한 이유다.
저자의 주장처럼 오늘날 반도체는 매우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스마트폰은 물론 가전제품, 의료기기, 군사 무기까지 반도체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한 2021년에도 1조1억5000만개의 칩이 제조ㆍ판매됐다. 전 세계 인구 1인당 125개씩 칩이 추가된 셈이다. 저자는 한 반도체산업 애널리스트를 인용해 대만이 중국의 침공을 받아 반도체 공급이 중단될 경우 세계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이나 2020년 코로나19 충격보다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
‘Arm, 모든 것의 마이크로칩’은 스마트폰 시대에 가장 중요한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이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날의 위상을 갖게 됐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Arm의 모태 기업 에이콘(Acorn)은 영국 공영방송 BBC의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BBC 마이크로컴퓨터 제품을 공급하면서 기반을 닦았다. Arm은 1990년 설립됐다. 시작은 초라했다. BBC 마이크로를 개발한 주역이었던 스티브 퍼버는 Arm이 경쟁업체들에 뒤진다고 생각해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공학 교수로 이직해 버렸다. 초창기인 1991년 3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주의 조용한 마을 스와프햄 불벡에 사무실을 냈는데 사무실이 들어선 건물 하비스반은 1980년대 말까지 말 헛간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초기 휴대전화 시장을 이끌던 노키아가 Arm의 기술을 채택하고 2007년 애플 아이폰의 출시로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Arm은 휴대전화 AP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다. 시장 점유율이 90%에 달한다.
책 전체에서 ARM과 애플의 오랜 관계가 다뤄진다. 애플과의 거래는 ARM이 기반을 다지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궁극적으로 ARM은 2016년 소프트뱅크에 인수되기까지 한다. 당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Arm에 지나치게 많이 투자했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Arm이 지난해 9월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손 회장은 막대한 투자 수익을 거뒀다. ARM은 반대로 애플이 컴퓨터 회사에서 스마트폰 회사로, 다시 기술 선도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기여했다
2020년 엔비디아의 Arm 인수 시도 좌절은 Arm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당시 알파벳(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은 엔비디아가 Arm 핵심 설계에 대한 접근을 제한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해 결국 엔비디아의 야망을 좌절시켰다.
Arm 관련 내용이 주로 다뤄지지만 1950년대 대통한 반도체 산업의 역사 전반을 죽 훑어볼 수 있다.
저자는 에이콘에 관한 글에 앞서 1950년대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이야기부터 다룬다. TI는 세계 최초로 집적회로(IC)를 개발했지만 정작 이를 상용화한 기업은 1957년 설립된 페어차일드 반도체였다. IC는 1996년 생산을 시작한 미국의 2세대 미사일 ‘미니트맨’에 대량으로 처음 적용되면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공동 창업자는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인데 둘의 성격이 정반대였다. 킬비보다 네 살 어린 노이스는 외향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는데 그는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연구개발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결국 회사를 뛰쳐나간다. 아무도 만들지 않는 제품이나 기술을 개발하겠다며 사직서를 낸 뒤 1968년 설립한 회사가 인텔이었다.
이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반도체 관련 역사가 계속 이어진다. 글쓴이가 인디펜던트, 선데이 타임스, 데일리 메일, 텔레그래프 등 다양한 성격의 매체에서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자료를 모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잡다한 내용도 다소 있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과정에는 방해가 되는 내용도 적지 않다.
Arm, 모든 것의 마이크로칩 | 제임스 애슈턴 지음 | 백우진 옮김 | 생각의힘 | 488쪽 | 2만7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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