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의 역사, 1791년에 최초 언급된 '이 단어'

완도신문 정지승 2024. 2. 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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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정지승]

ⓒ 완도신문
제주도는 대표적인 해양문화를 선점했다. 그것은 '제주해녀어업'이다. 부산 영도의 해녀문화전시관에도 제주해녀가 등장한다. 1887년 제주해녀가 영도에 유입된 것이 그 시초다. 울릉도까지 제주도 해녀가 차지했다.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을 해녀라고 부른다.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기록이 존재한다. 해녀어업문화는 제주도가 자랑하는 여성공동체문화다.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제주도민의 생존권투쟁이 확대된 결과다. 그 여성연대운동이 알려지면서 해녀어업문화의 중요성이 인정돼 국내의 해외문화재 등록 중 19번째로 해녀어업은 인류무형문화재에 등록됐다.

제주도 해녀어업은 2015년 국가중요어업유산 제 1호 등록에 이어,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면서 201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132호로 까지 등록했다. 해녀어업은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양문화유산 중 하나다. 세계에 빛나는 제주도만의 해양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해녀어업은 세계적으로 그만큼 특별하고 희귀한 해양문화로 손꼽힌다. 제주도에서는 해녀를 '잠녀'로, 해남을 '잠수'라고 불렀다. 해녀가 잡는 귀한 해산물은 전복이었다. 자연산 전복은 크기가 굵고 힘이 세서 채취과정에서 종종 사고가 발생했다. 숨 고르기 하는 전복을 따려고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가 빨판에 손이 닿아 그대로 바위에 달라붙어서 수면위로 못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힘이 센 남성들이 주로 전복을 채취하는 일을 도맡았고, 여성들은 낫을 이용해 미역 등 해조류를 채취하며 바다에 굴러다니는 소라를 건져내는 일을 했다. 

해녀의 역사를 살펴보면 1628년에 기록한 이건의 제주풍토기와 1665년에 기록한 이익태의 지영록에는 잠녀(潛女)라는 표현이 나온다. 1702년에 김남길이라는 화공이 그린 탐라순력도의 병담범주 편에는 물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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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위백규의 존재전서에서는 '잠녀'를 처음으로 '해녀'로 기록한 내용이 나온다. 존재 위백규 선생은 완도군 금당도의 무레꾼(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을 보면서順風流到平伊島. 統浦觀海女採腹. 其裸信佩瓢到入深淵'순풍이 불자 배를 띄워 평이도 (당시의 장흥부에 속한 현재 완도군의 금당도)에 이르렀다. 포구에서 해녀들이 전복 따는 것을 구경했다. 이들은 벌거벗은 몸을 박 하나에 의지하고 깊은 물속으로 자맥질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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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풍토기에서도 잠녀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낫을 들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미역을 따서 나온다고 기록했다. 육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남성들이 물질을 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이 물질을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물질하는 작업은 여성의 전유직업이 됐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6년 해양문화유산 등재에 고심이 컸다. 일본 역시 자국의 해녀를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서둘렀기 때문이다. 일본 도바시의 바다박물관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산소 호흡장치 없이 잠수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문화는 지구상에 제주도와 일본 열도 2곳에만 있다고 소개했다.

일본은 해녀를 '아마'라고 부른다. 일본 18개 현에는 2000여 명 해녀가 있다. 미에현의 시마반도에는 761명으로 일본에서 해녀가 가장 많다. 일본 학계에서는 3000년 전 미에현 도바시 시라하마 유적에서 다량의 전복껍질과 사슴뿔로 만든 해산물을 채취하는 도구인 빗창이 출토되어 선사시대부터 해녀가 존재한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 왕실 법도인 엔기시키에는 '시마국에 해산물을 진상하는 가즈키메(潛女)는 30명이다'라고 기록하는 등 8세기에 잠녀라는 글자가 문헌에 등장한 것도 있다. 고대 헤이안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해녀들은 일본 3대 신궁의 하나인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에 전복 등 해산물을 진상했다고.

우리나라 해녀의 존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3년) 문헌을 통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시대 여러 정사에서는 해녀가 진주 캐는 사람으로 묘사돼 왔다. 고대에는 전복에서 진주를 채취했던 것. 

물질 방법은 일본과 한국이 서로 다르다. 이와 비교해 제주해녀는 철저한 여성공동체문화로서 물질기술에 따라 상·중·하군으로 위계질서가 있는 잠녀회로 자리 잡았다. 제주해녀는 타고난 잠수기술과 작업의 효율성 덕분에 일본과 중국, 러시아와 블라디보스톡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1930년대 국내와 해외 원정 간 해녀는 대략 5000여 명에 이른다고 전한다.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록에 앞서 제주해녀와 일본해녀는 경쟁 대상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때 제주도 해녀를 연구한 고훈식 씨는 금당8경을 노래한 위백규의 존재집에 수록한 금당도선유기에서 '해녀채복'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눈이 번쩍였다. "해녀가 전복을 채취했다니..." 이제는 해녀가 일본문화의 잔재라는 껄끄러운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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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해녀잠업문화를 잠녀로 표기하려다가 해녀가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확신이 생겨서 '제주해녀'로 등록했다는 전언이다.

한편, 선사시대 사수도 해역에는 전복을 채취한 사람들이 살았다. 신석기시대 고대인이 전복을 먹은 흔적을 2005년 여서도 패총에서도 발견했다. 그 조사와 학술연구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완도군의 고대해양문화는 세간에 더 큰 관심거리가 됐을 것이다. 여서도 패총유적에서 발견한 전복껍데기는 선사시대 섬사람들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그것을 생각할수록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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