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일본의 반도체 속도전을 보라

김효진 2024. 2. 2. 11:1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현 TSMC 공장 '광속' 준공
韓,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출사표
중앙·지방 아우르는 컨트롤타워 긴요

1980~1990년대 일본의 반도체 르네상스는 하나의 기업이 설계와 제조를 모두 감당하는 ‘집약 소자 제조’ 방식과 특유의 정부 주도 체계에 힘입어 꽃피웠고 여기에 발목 잡혀 대략 20년 만에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제조공정과 수율관리에 드는 막대한 비용의 부담에서 벗어나 설계에만 집중하는 팹리스, 위탁생산에만 힘을 쏟는 파운드리가 세계 곳곳에서 부상하며 글로벌 가치사슬 중심으로 시장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전자장비의 첨단화로 맞춤형 수요가 증가하고 선행기술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2~3년으로 줄어든 가운데 스스로 구축한 ‘기술의 갈라파고스’에 갇힌 일본이 기업 간, 국가 간 협력 기반의 속도전에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다. ‘반도체 패망’ 이후 20년 넘게 와신상담한 일본의 결정은 자존심을 버리고 글로벌 가치사슬에 녹아드는 것, 즉 선행기술의 유효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뜨거워진 속도전에 서둘러 참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아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약진한 대만의 TSMC가 일본의 안방(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공장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일본 내 설비로는 최초로 16㎚(1㎚=10억분의 1m) 공정 능력을 갖춘 12인치 웨이퍼 반도체 생산 시설이다. 일본은 2020년을 전후로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기 위한 중장기 발전전략에 기초해 민관협력기금을 조성하고 대외 협력 프로젝트를 가동했는데, 당시 첫 협력 대상으로 점찍었던 기업이 세계 1위 파운드리 TSMC다.

이 공장은 2022년 2월 착공 후 약 1년10개월 만인 이달 준공된다. 통상 4~5년 걸린다는 공사를 2년도 안 돼서 해치웠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특별법이나 조례를 바탕으로 규제를 대거 걷어내 전력과 용수 같은 인프라 설비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24시간 내내 공사가 진행되도록 밀어준 결과다. TSMC는 일본에 두 번째 공장을 짓기로 한 데 이어 세 번째 공장 신설도 검토 중이다. 일본은 유사시 자국에 반도체를 우선 공급한다는 등의 조건으로 최소 12조원의 보조금 보따리를 풀었고 연구개발(R&D)·설계·생산 등 전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세계 곳곳의 기업들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 TSMC 반도체 공장(연합뉴스)

일본의 행보는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동맹을 기치로 거의 같은 시기에 추진된 미국 애리조나주 등지의 TSMC 공장 건설이 보조금 문제 탓에 여태 지지부진하다가 대통령 선거의 바람에 떠밀려 이제야 돌파구를 찾는 듯한 모습에 대비된다. 공급망 거점화 경쟁에서 이처럼 치고 나아가기 시작한 일본이 앞으로 10년 안에 메모리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을지도 모른다는 국내외 언론이나 전문가들의 전망은 괜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얼마 전 발표한 경기도 남부 일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 계획은 이 같은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출사표의 성격을 내포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민간 기업들의 수백조 원 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하며 계획대로만 된다면 세계 최대 규모다. 관건은 정부와 지자체가 반도체 설비의 핵심 요소인 물·전기·사람의 문제를 얼마나 원만하게 풀어줄 수 있느냐다.

2027년 준공이 목표인 용인 원삼면 SK하이닉스 공장과 관련해 남한강을 공유하는 여주시가 ‘물값’을 요구했던 사례는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난관의 예고편과 같다. 감사원의 ‘엄중주의’ 조치로 일단락됐지만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용수와 전력 공급에 있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해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TSMC가 일본이나 미국에서 그러는 것처럼 ‘밀당’을 해서 실리를 챙기기도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경쟁의 와중에 돈과 시간을 동시에 물려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청사진은 청사진일 뿐이다. 중앙과 지방, 정치와 정책을 아울러 과단성 있게 문제를 해결하고 속도감을 높이기 위한 컨트롤타워의 재구축을 포함해 구체적인 추진 계획이 조속히 제시돼야 한다.

김효진 전략기획팀장 hjn2529@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