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에 전쟁터 처음 나선 강감찬, 어떻게 영웅이 됐나
[이준목 기자]
'고려의 이순신'으로 불리우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고려-거란전쟁에 종군하여 귀주대첩(龜州大捷, 1019)에서 거란군을 섬멸하며 위기의 고려를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다. 그런데 강감찬의 대표적인 전공인 귀주대첩의 영향으로 '장군'의 이미지가 강한 그가 사실은 '문관'이었고, 무려 칠순의 나이에야 처음 실제 전장에 나서본 '초보 장군'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평생을 관료로만 살아온 인물이 늘그막에 갑자기 대장군이 되어, 그것도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군사강국이던 거란의 정예군을 격파하여 나라를 구해냈다는 영화같은 스토리는 어떻게 현실이 되었을까. 1월 31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3회에서는 '고려거란전쟁의 영웅, 70대 노장 강감찬은 어떻게 거란을 무너뜨렸나.'편을 통하여 강감찬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 3년이던 948년에 태어났고,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의 가문은 진주 강씨로, 그의 부친 강궁진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공헌하여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을만큼 최고의 공신 가문이었다.
그런데 사서에는 강감찬의 외모를 가리켜 '체모왜루(體貌矮陋)'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체격이 작고 얼굴이 못생겼다는 의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모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는 일이 드문 사서에도 언급되었을 정도면, 당대 고려인들의 기준에도 강감찬의 외모가 유난히 작고 볼품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신은 강감찬에게 외모는 주지 않았을 망정, 누구보다 출중한 능력과 청렴한 인품을 선사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따르면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 tvN |
또한 강감찬과 관련된 여러 설화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구전설화를 모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따르면 '강감찬의 아버지가 한 색시와 동참했는데, 그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여우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민간 전승에서 여우는 총명하고 여러 거지 조화를 부릴수 있는 요물 혹은 영물로 묘사된다. 그러한 여우의 재능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강감찬이 재주가 많은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토록 남다른 재능을 지닌 강감찬의 활약상이 역사에 등장하는 시점은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983년 12월 35세의 강감찬은 고려 역사상 최초로 국왕 성종이 직접 주관한 과거시험인 제술과(문장가를 뽑는 시험)에서 장원급제하며 늦은 나이에 관직에 출사한다. 당시 과거시험 합격자의 평균이 24-25세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10년 이상이나 늦은 출사였다.
당시에는 인생에서 큰 경험을 하면 이를 반영하여 개명하는 관습이 있었고, 강감찬 역시 이때부터 강은천에서 이름을 개명한다. '감찬(邯贊)'의 의미는 '땅이나 강의 신령이 돕는다'는 뜻으로, 그만큼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게 된 상황이 강감찬의 인생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과거급제 이후 관료가 된 강감찬의 행적은 다시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진다. 공식 역사서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경우, 5품 이하의 하급관리들은 특별한 사건이 아닌 경우, 정치적 행적이 기록되지않았다. 이는 강감찬이 급제한 이후에도 관운이 잘 풀리지않거나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강감찬이 고려에서도 손꼽히던 명문 공신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다만 <고려사>에는 강감찬에 대하여 '성품이 청렴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이 되었다'고 기록하며, 더딘 출세가 능력의 문제는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강직한 성격의 강감찬이 출세나 권력을 탐하기보다는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청렴한 관료로 살았던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강감찬은 성종-목종의 치세를 거쳐 8대 현종(1009-1031)의 치세까지 활동한다. 무려 세 명의 왕을 섬긴 강감찬은 현종이 재위할 무렵에는 이미 60대를 넘긴 고령이었다. 그때까지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던 강감찬의 인생은 물론, 고려의 운명까지 뒤바꾸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2차 여요전쟁(麗遼戰爭, 1010-1011)이다.
앞서 고려는 993년(성종 12년) 벌어진 1차여요전쟁에서 거란(요나라)의 침공을 받았으나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거란군을 철군시키고 오히려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대신 고려는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고 고려 왕은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 되기로 약속했다.
1009년 고려를 뒤흔드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다. 서북면 도순검사였던 무신 강조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한뒤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거란 황제 야율융서(요 성종)은 신하 강조가 무단으로 정변을 일으켜 제후국인 고려에서 황제의 책봉도 받지않고 현종을 옹립한 것을 문제삼아 군사를 일으켰다.
다만 이는 형식적인 명분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이유는 거란을 적대하며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이어가고 있던 고려에 대한 응징, 대외 정벌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야율융서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야율융서는 직접 4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26년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거란의 침공중 최대 규모였다. 거란군은 첫 전투인 흥화진에서 도순검사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공성에 실패한다.
흥화진을 포기하고 남하한 거란군은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격파하강조를 사로잡아 처형하는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이후에도 고려군의 끈질한 농성전으로 서경 등 주요 성들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거란군은 특단의 조치로 아예 국왕 현종이 있는 수도 개경을 직접 공략하는 직도(直擣) 전략을 선택했다.
기동력이 뛰어난 거란군이 빠른 속도로 개경까지 진군해오고 있다는 소식에 고려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에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이 팽배했다. 하지만 오직 혼자 단호하게 항전을 주장한 인물이 강감찬이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강감찬은 현종에게 "많은 수의 군사를 맞이하여 적수가 되지 못하므로 마땅히 그 칼날을 피하였다가 서서히 부흥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몽진(임금이 수도를 떠나 피난하는 것)을 제안했다.
당시 고려의 주력군은 모두 전방에 나가 있어서 어차피 개경에서는 거란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군사가 부족했다. 또한 강감찬은 거란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강조가 이미 붙잡혀 처형당한 만큼 거란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강감찬은 국왕 현종만 거란군에 붙잡히지 않고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거란도 전쟁을 오래 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현종은 강감찬의 조언을 받아들여 몽진을 결정했다. 현종이 떠난 후 3일만에 개경은 거란군에게 함락된다. 현종은 비록 몽진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에게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거란군의 칼날을 피하여 왕이 적에게 붙잡히는 최악의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 이 기간 강감찬의 행적은 사서에는 알려져있지 않은데, 학계에서는 강감찬이 현종을 호종하는 대신 별도의 임무를 받고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나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종은 외교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거란에게 친조(제후국의 왕이 상국의 조정으로 나아가 황제를 알현하는 것)를 제안한다. 고려는 1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과 형식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친조를 한적은 없었다. 고려로서는 표면적으로 거란을 섬기는 모양새를 통하여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고, 거란에게도 철군의 명분을 주기위한 전략이었다.
거란으로서도 고려군의 게릴라전으로 인한 피해와, 군사들의 보급-사기 문제 등으로 전쟁을 오래 끌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야율융서는 결국 남하하여 현종을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려의 친조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철군을 결정한다.
거란군이 물러간 이후에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전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강감찬의 공을 크게 치하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당시에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강감찬을 극찬했다고 한다.
2차여요 전쟁 이후 현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강감찬은 뒤늦게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강감찬은 7년 만에 정4품 예부시랑(오늘날의 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서 정4품 내사시랑평장사(오늘날의 비서실장)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고려와 거란의 재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란은 철군후에도 현종이 친조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강동 6주의 반환도 거부했다는 이유로 1018년 장군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하니, 바로 3차여요전쟁이다.
▲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 tvN |
현종이 이에 맞서 고려의 총지휘관인 상원수(上元帥)로 낙점한 인물은 놀랍게도 강감찬이었다. 당시 강감찬의 나이는 무려 71세, 현대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고령이다. 심지어 평생 문신으로서만 살아왔던 강감찬이 전쟁터에 나간 적은 없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행정공무원이 쟁쟁한 직업 군인들을 제치고 야전사령관이 된 격이다.
상대인 거란군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중 하나였고, 3차 여요전쟁에서 파견한 거란군은 황제 직속의 '피실군'으로 구성된 최정예부대였다. 거란군의 총대장인 소배압 역시 다수의 전장에서 군공을 세운 경력이 화려한 베테랑이었다. 이에 맞서는 고려군이 강감찬을 대장으로 세웠다 것은, 축구선수 경력이 없는 일반인이 대표팀을 이끌고 월드컵에 출전하여 브라질이나스페인 같은 강팀을 상대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는 고려의 특수한 군사행정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고려는 전시에도 직업군인인 무관이 아니라 문신들이 총사령관을 맡는 구조였다. 고려 초중기까지만 해도 문신들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행정업무만 하는 관료가 아니라 전략과 병법에도 어느 정도 익숙했다. 또한 대부분이 지방 호족 출신으로 사병이나 지방 영지를 통솔한 경험이 있어서 군사적으로 절대 무지하지 않았다. 특히 강감찬은 그중에서도 다방면으로 풍부한 경험과 출중한 재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기에 현종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군권을 맡긴 것이다.
강감찬은 흥화진 인근에서 벌어진 거란군과의 첫 충돌인 삼교천 전투에서, 둑을 무너뜨리는 수공과 매복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며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증명한다. 하지만 소배압의 목표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방어군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국왕 현종이었다. 소배압의 거란군은 현종을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수도 개경을 향하여 진격한다.
강감찬은 부장인 강민첨과 조원에게 거란군을 추격하게 했고, 병마판관 김종현에게는 1만의 정예 기병대를 주어 급히 개경으로 돌아가 수도를 지키게 했다. 현종 역시 이번에는 몽진하지 않고 수도에 남아 백성들과 함께 결사항전을 선택했다. 거란군은 진격 과정에서 고려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설상가상 무리한 진격으로 보급에도 큰 차질을 빚게된다. 거란군은 개경 인근까지 진군했으나 고려군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끝내 개경을 공략하지 못하고 철군을 결정했다.
강감찬은 거란의 침공 의지를 완전히 꺾기 위해서는 이 기회에 거란의 주력군을 섬멸해야한다고 생각하여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쫓고 쫓기던 양군은 결국 국경에 근접한 가운데 귀주에서 마지막 일전을 치르게 된다.
양군 모두 필사적인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강감찬이 수도로 보냈던 김종현의 정예 기병대가 때마침 나타나 고려군이 거란을 양면에서 포위하는 구도가 된다. 거란군은 이 전투에서 10만의 병력중 소배압과 수천여명의 병사만 겨우 살아남을 정도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침입한 외세의 야전군이 한번의 전투에서 당한 것으로는 최대 규모의 피해였다.
72세의 강감찬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선 전쟁에서, 고려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끈 전쟁 영웅이 되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등과 더불어 한민족이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거둔 최대의 승리중 하나로 기록된다.
귀주대첩 이후 큰 피해를 입은 거란은 두 번다시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고,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진다. 이후 100여년간 고려는 외침을 받지않고 평화의 시대를 열었고, 국제정세는 송나라-거란과 힘의 균형을 이루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강감찬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수도로 귀환했다. <고려사>에는 '현종이 친히 영파역까지 나와 영접하며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 이후에도 오랫동안 현종의 곁을 지키며 관직을 역임했고, 83세의 나이에 문신직의 최고벼슬인 문하시중(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오른다. 살수대첩 이후 행적이 묘연한 을지문덕이나, 노량해전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이순신 장군과 달리, 강감찬은 공신으로 평생 대우받으며 천수를 누렸다는 것도 인상깊은 대목이다. 뒤늦게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강감찬은 1031년 8월 , 84세의 나이로 만인의 추모를 받으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낙성대에서는 매년 강감찬 장군을 기념하며 추모하는 인헌제가 열린다. 강감찬은 전쟁에서는 뛰어난 장군이었고, 조정에서는 청렴한 관료이자 유능한 신하로 평생을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인물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항상 영웅을 갈망한다. 고려와 우리 민족을 수호해낸 강감찬같은 인물이 현대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재조명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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