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가사는 안 된다? 농염해진 K팝의 딜레마

이은호 2024. 2. 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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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여자)아이들. 큐브엔터테인먼트

“조심스레 키스하고 과감하게 먹어치워” 그룹 (여자)아이들은 지난달 22일 공개한 신곡 ‘와이프’(Wife)에서 이렇게 랩을 했다. “만약에 잘한다면 나도 배도 부르고/ 기분 좋으니까 깊숙이 더 삼켜버릴 거야”란 가사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음식을 먹거나 삼키겠단 뜻이지만 성행위를 은유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노래는 공개 직후 온라인에서 ‘가사가 선정적’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KBS 심의실은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묘사된 가사”를 이유로 이 곡에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다.

파격일까, 외설일까. K팝 가사가 성(性)이라는 금기에 한층 가까워지고 있다. ‘와이프’가 대표적인 보기다. 노래 가사로 등장하는 ‘체리’ ‘케이크’는 여성의 신체를 빗댄 은어로 쓰인다. 노래는 이렇게 상대와의 성애적 관계를 드러내면도 ‘넌 나를 아내로 원하겠지만 난 아내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성적 욕망을 실현하되 전통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가사가 새로운 느낌을 준다. 업계에선 “섹슈얼리티를 표현한 노래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순 없으나 선정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평가가 나온다.

육체적 관계를 암시하는 ‘매운맛’ K팝 가사는 최근 증가하는 추세다.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정국은 솔로곡 ‘세븐’과 ‘3D’를 각각 ‘익스플리싯’(Explicit·솔직한) 버전과 ‘클린’(Clean·깨끗한) 버전으로 나눠 공개했다. 두 곡 익스플리싯 버전은 직접적인 성적 표현을 담고 있다. 그룹 더보이즈 멤버 선우와 에릭이 지난해 11월 낸 유닛곡 ‘허니’(Honey)에도 농염한 은어가 쓰였다. 영어로 된 가사는 ‘네가 올라탄 모습’(how you ride it up)이나 ‘널 얻기 위해’(to get the juice) 등 성적 행위를 묘사한다. 그룹 블랙핑크 제니는 지난해 미국 코첼라 뮤직 앤 아트 페스티벌에서 솔로곡 ‘유 & 미’(You & Me)로 공연할 당시, 가사 일부를 바꿔 한층 섹슈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수 화사는 자신의 퍼포먼스가 공연음란 혐의로 고발 당한 이후 수위 높은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가수 성시경 유튜브 채널 캡처

뜨거워진 K팝이 언제나 환영받는 건 아니다. 그룹 마마무 멤버 화사는 tvN ‘댄스가수유랑단’ 촬영을 위해 서울 한 대학 축제에서 솔로곡 ‘주지마’를 부르며 신체를 강조하는 춤을 췄다가 경찰서에 불려가는 봉변을 겪었다. 학부모단체 학생학부모인권연대가 “대중에게 수치심과 혐오감을 줬다”며 공연음란 혐의로 고발하면서다. 사건은 불송치(혐의없음) 처분으로 마무리됐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공연장에 있지 않았던 제3자인 학부모 단체가 고발하는 것은 예술의 기본적인 정신이나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직접 노래를 만드는 아이돌 가수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아이돌이라는 직업적 특수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파격적이거나 도발적인 가사를 쓰고 싶어도 대중의 정서를 걱정해 망설이는 사례가 많다는 의미다. 또 다른 기획사 관계자는 “영화나 드라마 속 성적인 장면은 예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아이돌 음악에 담긴 성적인 표현을 가수 개인의 인격과 연관 짓는 일이 많다. ‘야한 노래를 쓴 가수는 머릿속에 야한 생각밖에 없다’는 식”이라며 답답해했다. 실제 섹시한 이미지로 사랑받던 한 여성 가수는 과거 성적인 루머와 성희롱으로 인한 고통을 공개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 가수들의 표현 수위가 높아졌다고는 해도 카디 비 등 미국 가수들만큼 자극적인 수준은 아니다. 다만 한국 대중을 상대하는 만큼 한국적인 정서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면서 “성적 표현이나 욕설 수위가 높다면 청취 연령에 제한을 두는 것도 가능한 방법 중 하나다. 섹슈얼한 가사를 쓰면 안 된다고 저지할 순 없으나 성적 함의를 지닌 노래를 낼 땐 그에 따른 비판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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