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대가의 마감과 불안

2024. 2. 2.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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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수많은 창작자가 호소하는
'시한'에 쫓기는 고통
이를 이겨내야 한단계 승화

심각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하얗게 센 머리에 깊게 팬 이마 주름. 한눈에 봐도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을 것 같은 남자의 이름은 스즈키 도시오.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대표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프로듀서이자 대표다.

그가 통화 중인 상대는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물론 영화계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지난밤 잠을 설쳤다는 그에게 스즈키 도시오는 몇 번이나 괜찮다, 잘하고 있다는 위로를 건넨다. 전화를 끊은 그는 “(작업하다 보면) 가끔 불안이 찾아오거든요”라고 말한다. 상황 설명을 위한 각주인지 푸념처럼 하는 혼잣말인지 모를 말의 여운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지난해 말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작을 주제로 한 일본 NHK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한 2399일’의 한 장면이다.

공교로운 건 그 영상을 발견한 나도 마감을 앞두고 닥친 불안 속에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SNS 타임라인을 무수히 ‘새로 고침’ 하는 중이었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영화계 역사를 바꿔놓은 거장의 불안이 품은 깊이나 빛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의 불안도 불안, 마감도 마감이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분야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터넷 유행의 갈래인 밈(meme) 제조기 같은 인물이다.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오프닝부터 밈으로 사용될 만한 명장면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촬영 대본(콘티)을 그리며 ‘귀찮다’는 말을 반복하다 갑자기 ‘바보’라며 화를 낸다. 도무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이 모든 기행의 뿌리엔 다름 아닌 마감이 있다.

이건 비단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례만이 아니다. 지난해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성공으로 일본은 물론 한국 문화 시장에도 큰 영향을 끼친 일본의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경우를 보자. 역시 NHK에서 2009년 방송한 다큐멘터리 ‘프로페셔널-일의 방식’에서 그는 마감 전날에야 겨우 스케치에 들어간 뒤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작업에 초조해하다 끝내 작업하던 종이를 바닥에 집어 던진다.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촬영하던 제작진에게 잠시 촬영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의 모습에서 ‘작품’ 수준의 작화로 유명한 대작가의 오라(aura)보다는 마감이 던지는 불안에 알면서도 매번 당하는 창작자의 가련함이 먼저 떠오른다.

이외에도 많은 예가 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음악가 한스 짐머는 마이클 베이, 리들리 스콧, 드니 빌뇌브 등 으리으리한 감독들과 함께 작업한 영화 음악만큼이나 유명한 인터넷 밈의 주인공이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랗게 뜬 눈에 새빨간 얼굴로 ‘그냥 다시 전화해서 다른 사람 쓰라고 할까?’라고 말하는, 언젠가 마감을 앞두고 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준 바로 그 사람이 한스 짐머다. 2002년 영화 ‘프리다’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작곡가 엘리엇 골덴탈도 요즘 뜨는 인터넷 밈의 주인공이다. ‘음악 작업은 반밖에 못했는데 포스터에 제 이름이 나왔을 때예요.’ 인터뷰 앞뒤로 정확히 무슨 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온 얼굴로 ‘망했어요’를 표현하고 있는 이미지 속 그의 눈코입을 보고 있으면 ‘그 마음 알아요’라며 손이라도 꼭 잡아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네티즌은 예로부터 수많은 창작자의 마감 고통을 수집해 왔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마감 압박에 시달리던 며칠 전의 또는 지금의 나처럼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경으로 잠시 인터넷에 한눈을 판 이들이 수집에 앞장섰을 것이다. 집단지성이 모은 대가들의 불안 밈은 나만의 마감을 앞둔 수많은 창작자에게 큰 위안을 준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도 저렇게 불안해하는데. 인터넷에 박제된 대가의 불안은 오늘도 제 몫을 한다. 역시 대가는 뭔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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