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컷 cut] 사람 믿은 게 죄인가요?
검찰 취재할 때 들은 얘기다. 어느 검사가 사기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피의자가 “구내매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조사실로 돌아오지 않아 수사관이 내려가 보니 다른 이들을 상대로 또 사기를 치고 있더라는 것이다.
가해자는 다리 뻗고 자도 피해자는 잠들지 못한다고들 한다. “창피한 놀이감이 되고 말았다”는 억울함과 자괴감 때문이다. 특히,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으면 절망감이 밀려든다.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고, 주변 사람들은 걱정해주는 양 혀를 찬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정신 바싹 차리고 살아야 한다니까.”
‘시민 덕희’는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한 영화다.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덕희(라미란)는 ‘화성은행 손진영 대리’의 전화에 속아 전재산인 3200만원을 날린다. 형사를 붙들고 하소연하지만 답답하다는 표정만 돌아온다. “근데 전혀 눈치를 못 채셨어요? 이 정도면 느낌이 드셨을 텐데.” 결국 피싱 조직 총책을 직접 잡으러 나선 덕희는 분통을 터뜨린다. “사기 당한 게 내 탓이냐? 사기 당한 내가 등신이냐고? 아니야. 내 잘못 아니고 절실한 사람들 등쳐먹는 놈이 잘못한 거야.”
그렇다. 우린 속인 사람보다 속은 사람을 열등하게 취급해왔다. 사람 믿은 게 큰 잘못이라도 되는 듯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어이없이 속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 속 덕희를 보라. 집에 불이 나서 아이들과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그런 그에게 ‘손 대리’의 전화는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 같았을 터.
함부로 피해자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 그들은 절박한 상황과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벼랑에 내몰린 것이다. 스스로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남들의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다. “믿는 놈이 바보”라는 말이 삶의 지혜가 되는 사회는 황량한 가설무대일 뿐이다. 그 안에 어떤 사회적 신뢰도 자랄 수 없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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