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사르밧 과부…명화에서 만난 익숙하고도 낯선 그녀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알리는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유명 서양화가가 즐겨 다룬 인기 주제다. 처녀가 아이를 밴 전대미문의 사건이건만 마리아의 표정은 평온할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역시 기품 넘치는 모습을 강조한다. 한데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로렌초 로토의 수태고지 속 마리아는 여타 작품 묘사와는 다르다. 가브리엘에게 등을 돌린 마리아의 시선은 관객을 향하고 있다. 뒤돌아선 마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구름 타고 달려온 하나님까지 등장한다.
기독교 인문학자인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는 이 그림에서 ‘순종하되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상’을 발견한다. ‘주님의 여종’을 자처한 마리아의 고백(눅 1:38) 속에 “세상 질서를 뒤집어엎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수태고지 후 마리아가 부르는 노랫말(눅 1:46~55)이 그 증거다. “약자와 소수자를 편드는 하나님이 찬양받는” 이 가사에서 구 교수는 “세상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하나님 뜻에 자기를 개방하며 훌훌히 살아가는 여자”가 곧 마리아임을 밝힌다.
서양 종교화를 매개로 수천 년 전 이야기를 21세기에 맞게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인 구미정 교수. 그가 최근 ‘교회 옆 미술관’(비아토르)을 펴냈다. 성경과 외경(外徑) 속 여성 25인의 삶을 그린 미술 작품을 해설했다. 최근 ‘죽음 준비’를 주제로 강의 중인 그를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각당복지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구 교수는 ‘생태여성주의’로 박사 학위를 받은 기독교윤리학자다. 미술 전공이 아닌 그가 서양 종교화로 성경을 풀어낸 배경엔 ‘CBS 성서학당’ 출연이 있다. 2011년 당시 강사진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구 교수는 타 강의와의 차별화를 위해 이성뿐 아니라 감성으로도 성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강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준비한 도구가 성화(聖畫)다. 그는 성경 인물화뿐 아니라 렘브란트 반 레인과 빈센트 반 고흐, 마르크 샤갈 등 거장의 그림에서도 복음의 진수를 추출한다.
구 교수는 “개신교는 일상이 예배이기에 개신교 신자인 고흐가 그린 풍경화에서도 기독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고흐의 명작 ‘별이 빛나는 밤’을 살펴보면 건물 중 유독 교회만 불이 꺼져 있다. 빈부 격차 등 사회 문제와 거리를 둔 19세기 유럽 교회는 죽었다는 의미다. 그는 “신앙의 눈으로 작품을 해독하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림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태도를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불렀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접붙여 살려는 노력이 곧 성육신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책 속 기독교 여성 26명 중 기억에 남는 이들로는 사르밧 과부와 살로메를 꼽았다. 구 교수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수중의 마지막 음식을 건네는 이방 여인 사르밧 과부는 약자를 대변한다”며 “죽음 앞에서도 고통의 감수성을 잃지 않은 이 여인을 보며 한국 기독교가 이런 감수성을 사회에 발휘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봤다”고 했다. 그림 이름 표기가 잘못됐던 초판 지면 속 살로메 역시 인상 깊다고 했다. 결국 책은 재인쇄에 들어갔지만 독자들은 파본을 ‘희귀템’으로 부르며 구매를 요청했다. 그는 “출판사의 작은 오류가 공감과 우정으로 이어진 게 놀랍다”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웃었다.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늘고 미술관에 관한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르는 등 최근 MZ세대를 주축으로 미술에 대한 인기가 뜨겁다. 구 교수는 “스치듯 봐서는 작품의 진가를 알기 힘들다”며 “서양 종교화를 볼 땐 작가의 영성에 접선해보자. 그러다 보면 종교를 넘어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이들 작품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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