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허무인 명의 특정 후보자 지지 서명부 사문서위조죄 대상 아냐”
허무인(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 명의로 작성된 특정 후보자에 대한 서명부는 사문서위조죄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공직선거법 위반 및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의 상고심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유죄를 인정, 벌금 100만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2심 법원과 마찬가지로 김씨의 사문서위조 혐의와 위조사문서행사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국민의힘 당원인 김씨는 2022년 2월 당시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서명부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315명의 이름과 회사, 지역을 기재해 21부의 서명부를 만든 뒤 이를 사정을 모르는 다른 당원 A씨에게 전달했다.
원래 김씨는 다른 당원들과 1만명의 지지 서명을 모아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하려다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지만, 실제 허위 작성된 서명부가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선거 기간 정치적 서명운동을 한 점에 대해서는 공직선거법 위반죄를 적용해 벌금 100만원을, 서명을 위조한 점에 대해서는 사문서위조 및 행사죄를 적용해 별도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에서 김씨 측은 김씨가 검찰의 공소사실대로 허위의 서명부를 작성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김씨가 작성한 서명부는 형법상 문서에 관한 죄에서의 사실증명에 관한 문서가 아니라 의견이나 호소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위조한 이 사건 서명부는 형법상 문서에 관한 죄에서의 문서에 해당한다"며 김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 서명부에는 '제목 : 윤석열 후보지지 거제 서민, 노동자 1만인 선언, 내용: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거제지역 서민과 노동자들은 무능한 정권을 심판하고 공정과 상식, 정의로운 사회건설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윤석열 후보를 지지합니다. 윤석열 후보 지지 거제 서민, 노동자연대'라고 기재돼 있다"라며 "이 사건 서명부에 서명을 하는 것은, '서명자가 대통령 선거에서 특정 후보자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는 사회생활상 의미 있는 사항에 관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2심 법원은 김씨를 사문서위조 및 행사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보고 해당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1심 판결을 파기했다. 다만 1심이 유죄로 판단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항소는 기각, 1심의 벌금 100만원 형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작성한 서명부는 선거를 앞두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구호나 지지 호소가 담긴 내용이 포함돼 있을 뿐 어떠한 권리·의무의 변동이나 법률관계에 직·간접적으로연관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항이나 의사표시가 포함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권리·의무에 관한 문서 또는 거래상 중요한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이 A씨 외 다른 사람들에게 위 서명부를 제시했거나 위 서명부를 이용해 정치적 지지선언을 위한 기자회견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한 행사를 계획했다고 볼 만한 사정도 없다"라며 "피고인이 작성한 서명부 21장은 형법상 사문서위조의 객체가 되는 '문서'라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행사의 점을 유죄로 인정한 원심의 판단에는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도 이 같은 2심 재판부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사문서위조죄로 처벌하려면 해당 문서가 특정한 권리나 의무의 발생·변경·소멸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거나, 거래상 중요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재판부는 "문서의 주된 취지가 단순히 개인적·집단적 의견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적어도 실체법 또는 절차법에서 정한 구체적인 권리·의무와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경우이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재판부는 "피고인이 작성한 이 사건 서명부 21장은 주된 취지가 특정한 대통령후보자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 의사를 집단적 형태로 표현하고자 한 것일 뿐, 실체법 또는 절차법에서 정한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관한 문서 내지 거래상 중요한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러한 취지의 원심의 판단에 형법상 사문서에 관한 법리를 오해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상고를 기각한 이유를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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