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 있지만…” 육아친화 도전하는 中企, 인력·비용 문제에 ‘난감’[K인구전략]
일·가정 양립 실현 때 높은 퇴사율 해결 기대
육아휴직 시 동료 업무 가중…실질 지원책 필요
편집자주 - 대한민국 인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기업에 있다. 남녀 구분 없이 일로 평가하는 기업 내 분위기와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곧 K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적어도 일터에서의 부담감이 걸림돌이 돼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아경제는 가족친화 정책을 선도하는 기업을 찾아가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지점을 짚고,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기업과는 다각도에서 함께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기업부터 변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분석한다. 금전적 지원보다 심리적 부채감을 줄여주는 회사의 문화와 분위기가 핵심이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다양한 측면에서의 대안을 제시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중소 건설사 미래도시건설 사무실. 고성이 오가는 마초적인 분위기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환한 분위기가 방문객을 맞았다. 사무실 집기는 흰색 계열로 통일됐고 자리마다 칸막이가 높지 않아 개방감이 있었다. 직원들은 칸막이 너머로 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자리로 찾아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음악 듣기 좋죠?" 박상천 미래도시건설 법무팀 팀장은 웃으며 인터뷰 장소인 회의실 문을 열었다. "원래는 여기 별명이 군대 내무반이었습니다."
미래도시건설은 지난해 5월 여성가족부의 가족친화인증을 신청했다. 가족친화인증은 여가부에서 2008년부터 직원의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사내 환경을 조성한 회사에 부여하는 인증 제도다. 전체 임직원 225명 가운데 여성이 18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미래도시건설은 일·가정 양립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에 대해 이형용 미래도시건설 대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대표는 "남성도 육아하는 시대"라며 "집에 있는 둘째 아이가 아직 8살이 안 돼 육아에 한창이던 때 가족친화인증을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수주에만 관심 쏟던 중소 건설사…일과 가정 양립에 도전
가족친화인증은 10년 넘게 운영된 제도지만 여전히 중소기업에 생소하다. 지난해 기준 가족친화인증을 받은 중소기업은 4110개로 전체 중소기업 수(771만4000개) 대비 약 0.05%에 불과하다. 특히 중소 건설사는 가족친화인증 자체에 큰 관심이 없다. 수주를 따야만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구조여서 일·가정 양립은 언감생심이다. 미래도시건설 역시 직원의 90% 이상이 회사의 핵심 먹거리인 수주에만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복지제도 구축, 복지제도 관리 전담 인력 채용 등은 회사에서 뒷전이었다. 그나마 신경 쓴 복지는 공사장 현장 직원의 안전 정도다.
그럼에도 미래도시건설은 이번 기회에 일·가정 양립 관련 복지제도를 만들기 위해 가족친화인증을 신청했다. 직원들의 일·가정 양립이 실현된다면 20%에 달하는 높은 퇴사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매년 퇴사하는 직원 중 절반은 높은 업무 강도를 버티지 못하고 2~3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그럴 때마다 직원을 새로 뽑기 위해 추가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남은 직원의 업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불어났다. 가족친화인증을 추진한 박 팀장은 "과거에는 추가 업무를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는 분위기였지만 요즘 세대는 일·가정이 양립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그만둔다"며 "모든 중소기업이 인력난에 시달리는 와중에 다른 중소 건설사와의 차별점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정부도 일·가정 양립을 위해 노력하는 중소기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 김현숙 여가부 장관이 미래도시건설 사옥을 방문해 일·가정 양립에 어려움을 겪는 직원의 의견을 청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대표는 "장관과 공무원들이 와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갔다"며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미래도시건설 직원들이 허심탄회하게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미래도시건설은 최근 여가부의 추천으로 가족친화인증 컨설팅을 받기 시작했다. 컨설팅받는 기업은 심사를 준비하면서 사규·인사·노무를 정비하고 유연근무제 등을 설계하게 된다. 이 대표는 "일종의 ‘족집게 과외’라고 보면 된다"며 "가족친화인증 기준 가운데는 정성적 요소가 많은데 얼마만큼 충족하고 홍보해야 하는지 정량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인력·비용 문제 직면하는 중소기업…"실질적 지원책 필요"
하지만 이 대표는 가족친화인증을 받기까지 갈길이 멀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족친화인증을 받기 위해 출산휴가 사용률, 육아휴직 사용률 등 수치를 제출해야 하는데 통계를 뽑아내는 것 자체가 중소기업에는 인력 부담이자 큰 지출이다. 이 대표는 "이런 통계를 전담하는 직원이나 시스템이 회사 내에 없다. 결국 기존 직원들의 업무 과중으로 연결되거나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한다"며 "정부가 인사관리 업무를 세분화한 대기업 위주로 생각한 건 아닌지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일·가정 양립 등 복지 제도와 관련한 비용 역시 부담이다. 직원들의 자녀학자금 지원을 고려하고 있지만 경기가 나빠질 가능성 등을 생각하다 보면 금액을 정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몇 년 근속자부터 줘야 할지, 학자금 자체를 지급할지 대출 이자만 지원 대상으로 정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박 팀장은 "미래도시건설은 40년 동안 임금체불도 없고 다양한 계열사를 가지고 있어 그나마 부담이 덜하다"며 "다른 중소기업에서는 이러한 복지제도를 꿈조차 꾸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다수의 기업이 일·가정 양립 제도로 인해 발생하는 인력·비용 문제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2022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사업체 가운데 25.3%가 육아휴직에 의해 발생하는 경영상 어려움으로 동료 및 관리자의 업무 가중 문제를 1순위로 꼽았다. 이어 인건비 및 노동비용 증가와 대체인력 충원 어려움을 겪은 사업체의 비중은 각각 15.9%, 15.7% 등이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서 이런 어려움을 호소했다. 10~29인 사업체 가운데 67.3%가 육아휴직으로 인한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응답하는 등 300인 이상 사업체(61.8%)보다 5%포인트 이상 비중이 높았다.
중소기업의 부담은 직원들의 육아휴직 사용률의 감소로 이어졌다. 지난달 20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육아휴직통계'에 따르면 300명 이상 사업체의 엄마 육아휴직 사용률은 79.2%지만 5~49명 사업체와 4명 이하 사업체는 각각 62.6%, 32.7%에 불과하다. 아빠 육아휴직 사용률 역시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떨어졌다. 300명 이상 사업체의 아빠 육아휴직 사용률은 9.3%인 반면, 5~49명과 4명 이하 사업체의 경우 각각 4.5%, 3.2%였다.
육아휴직을 이용한 후 업무에 온전하게 복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의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9월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기업 규모별 육아휴직 고용 유지 현황'에 따르면 2022년 7월 기준 중소기업(300인 미만) 육아휴직 종료자의 1년 내 고용유지율은 71.1% 수준이었다. 중소기업 육아휴직자 10명 중 3명이 1년 이내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300인 이상의 대기업은 육아휴직 사용자의 88%가 1년 이상 고용보험을 유지했다.
일·가정 양립을 고려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실질적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가족친화인증을 받은 중소기업에는 여가부가 부여하는 가족친화인증마크, 고용창출장려금 공모사업 가점 5점, 기술보증기금 기술평가 보증료 0.1% 감면, 해외마케팅 지원 업체 선정 시 가점 등 혜택이 주어진다. 해당 기업 임직원은 병원비, 호텔, 공연장, 지방자치단체 시설 등을 할인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매출과 직결되는 부분을 지원해야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친화인증에 도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소 건설사 입장에서는 조달청 시설공사 입찰에서 확실한 가점을 주는 게 유인이다. 이 대표는 "조달청이 입찰을 진행하는 사업에 참여하는 대기업은 가점을 지닌 중소 건설사를 컨소시엄에 포함하려 한다"며 "중소 건설사는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일으킨다. 가족친화인증이 조달청 사업에서의 많은 가점으로 이어진다면 많은 중소 건설사가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 마련에 힘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일과 가정 양립 도전만으로도…사내 문화 변화 얻었죠"
"가족친화인증을 받지 못하더라도, 실패는 아닙니다." 박 팀장은 가족친화인증을 신청하면서 일과 가정 양립과 관련된 복지제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미래도시건설은 내년부터는 출산한 직원에게 출산보조금 100만원을 지급하기 위해 예산을 책정했다. 아울러 자녀학자금 지원 및 대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자금을 준비하고 있다. 당장 1~2명 정도 시험 삼아 학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딱딱하던 기업 문화가 바뀌는 부수적 효과도 따라왔다. 미래도시건설 역시 그간 여타 중소 건설사처럼 수직적이고 다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일했다. 직원이 그만둔다고 하면 개선보다는 ‘부품 끼워넣기’ 식으로 대체 인력을 뽑는 데 급급했다. 가족친화인증 신청 이후, 점심시간이 기존 오전 12시에서 11시30분으로 당겨졌다. 40년 동안 고수한 시간이었지만 밥 먹는 시간을 유연하게 가지고 싶다는 직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세미정장만을 고집하던 복장 규정도 자유롭게 바뀌었다.
박 팀장은 "기대했던 효과"라며 "외부적 충격 없이는 사내 문화가 바뀌기 어렵다고 봤다. 이번 가족친화인증 신청이 사내 문화가 부드러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분명 대기업이나 스타트업에 비해서 작은 변화"라면서도 "작은 변화조차 우리 기업에 소중하다.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 'K인구전략-양성평등이 답이다' 김유리·이현주·정현진·부애리·공병선·박준이·송승섭 기자김필수 경제금융에디터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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