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박지니 2024. 2. 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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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3월 5일까지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인식적 정의'를 기획하며

거식증, 폭식증 같은 하위 질환명으로 더 잘 알려진 섭식장애(Eating Disorders)는 현상으로서의 증상만 놓고 보면 수 세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뿌리 깊은, 인간적인 질환이다. 지난 5년간(2018년~2022년) 섭식장애로 진료받은 인원은 총 5만여명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숨은 환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모임으로, 지난 2023년 2월 말 국내에서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주최했다. 올해도 두 번째 행사(2/28~3/5)를 준비 중이다. 이번 연재기사를 통해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고 준비해 온 과정과 고민을 펼쳐 보이고, 섭식장애를 경험한 당사자들과 가족 그리고 치료자의 글을 통해 지금-여기에서의 섭식장애의 진실을 밝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기자말>

[박지니]

40대 중반인 나는 <삼키기 연습 : 스무 해를 잠식한 거식증의 기록>(글항아리, 2021)의 저자로 내 섭식장애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출판사는 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삼키기 연습>은 20년 가량 거식증을 겪어온 저자가 '환자'가 아니라 '화자'로서 써낸 수기다. 소설 같기도 일기 같기도 한 이 책에 회복과 치유의 감동적인 서사는 없다. 저자에게 있어, 거식증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만 할 깊고 본질적인 진실, 좀더 많은 지식으로 번역해내야만 할 경험이다".   

나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소모임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대표이자 일원으로 오는 2월 말 열릴 한국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아십니까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4) 공식 포스터.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지난해 나는 우연한 기회로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당시 국내외 많은 이들이 환영해 준 행사를 일회성으로 끝내 버릴 수 없었고, 자진해서 작년 11월부터 다시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준비에 뛰어들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으로 급하게 꾸린 비영리임의단체지만 호기롭게도 그 해의 행사 주제부터 세션 기획, 섭외까지 혼자 결정해 추진하는 묘한 1인기획 체제로 스스로를 굴리고 있다.

나는 어느 선생님의 말마따나 '무용한 사회운동'에 골몰하고 있는 걸까. 이 일은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맡지 말라고 권하시는 다른 선생님께 "저도 그럴 수 있다면 이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공부와 글쓰기에 치중하고 싶어요", "하지만 희한하게 저는 이 일을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답메일을 썼다. 실로 나는 이 일이 - '가상현실 시뮬레이션'과 정반대이면서 비슷한 - '실세계 실험(real-world experiment)'처럼 느껴진다.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과도 관련이 없고, 그렇다고 어떤 자격이나 권한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연히 기회가 열렸고, 나는 혼자 머릿속에 그리다 끝날 수도 있었을 조우와 사건들을 현실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계기는 2022년 11월이었다. 디지털 헬스케어 회사에서 일하던 나는 우연히 대한비만학회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한국에 제대로 된 섭식장애학회가 아직 없다는 데 화가 났다. 학회를 만들려면 국내 몇 없는 섭식장애 전문 의료인들 가운데 학계 활동이 활발한 분에게 협력을 구해야 했다. 나는 당장 인제대 백병원 김율리 교수님께 메일을 썼다.

나는 내 책을 선물로 든 채 모즐리회복센터 사무실에 가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이어 '한국의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열고 그 행사로 홍보를 시작해 섭식장애학회를 설립하자'는 취지의 교수님 제안에 그 자리에서 당장 인식주간 세션들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애석하게도 섭식장애학회는 현재까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2월 말 열린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3) 현장 사진들. 왼쪽은 당시 당사자 세션에 패널로 참여했던 이진솔, 박채영, 김윤아, 박지니(왼쪽부터), 오른쪽은 필자 본인의 모습이다(바바라님 촬영).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은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나라에서는 1980~90년대부터 연간 개최해 오고 있는 행사다.

이미 수많은 섭식장애 전문가와 치료기관, 단체들을 탄탄히 갖추고 있는 이들 나라에서는 전문적 인프라를 중심으로 자선행사나 인식 개선 캠페인, 임상적 세미나 위주로 행사가 주로 채워진다.

우리에겐 어떤 인프라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 지금 시점에 꼭 다뤄야 한다고 믿는 사안들이 있었고, 그래서 '기획' 작업 자체는 내겐 전혀 일이 아니었다.  

내가 쓴 <삼키기 연습>이라는 책도 그렇다. 이 책은 짧은 기간 쓰인 게 아니라 1997년부터 내가 겪어 온 일 - 학창시절부터 축적돼 온 우울증, 자살기도, 섭식장애 입원병동 경험 등 - 을 2008년 무렵부터 단편소설 분량으로 써 모으고 그걸 2020년 순서에 맞춰 묶고 빈 곳을 채워 완성한 것이다.

그만큼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섭식장애 경험과 그것이 관통한 사회적 맥락을 맹렬한 화두로 삼고 살아왔다. 덕분에 내 사고와 신체에 투입된 다양한 것들이 '섭식장애'라는 난해할 수 있는 이슈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묶일 수 있었다. 
 
 2023년 5월 서울 무아레서점에서 '몸과 세계 사이에서'라는 주제로 열린 <삼키기 연습> 북토크 당시 찍은 사진. 필자가 추천한 책들이 <삼키기 연습>과 함께 진열돼 있다.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그렇게 2023년 2월 말 서울의 독립서점들에서 개최한 우리의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나는 섭식장애 연구의 권위자 미국 신시아 불릭 교수,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이자 사회학자 연구자인 일본의 나카무라 히데요 교수 등 국내외 다양한 인사들의 응원 영상을 받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친구들과 같이 기고할 매체를 찾고, '프로아나(Pro-Ana: 거식증을 옹호하는 경향)' 문화를 전시하는 선정적 보도 방식을 쉽게 포기하질 못하는 언론과 싸웠다.

또 행사 준비로 시시때때로 맞닥뜨리는 좌절과 분노를 최대한 영악히 다스리고, 무엇보다 행사 진행비를 지원해 줄 기업 스폰서십을 수소문해 확보하고, 7일 간의 세션 전부를 촬영해 유튜브 라이브스트리밍으로 실시간 중계했다.  

올해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오는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역시 7일을 꽉 채워 열릴 예정이다. 너무나 감사히도 헤이그라운드에서 서울숲점이란 근사한 공간을 지원해 준 덕분에 장소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됐다. 이제 남은 건 애초 기획한 대로 모든 세션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금 후원처를 찾아내는 일뿐이다. 

약자들의 말은 왜 신뢰받지 못하는가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주제는 대담하게도 '인식적 정의(Epistemic Justice)'로 정했다. 첫 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니,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가 이론화한 '인식적 부정의'란, 어떤 상황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이들의 말이 전혀 신뢰받지 못하거나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음으로써 폭증되는 부당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굳이 '부정의' 대신 '정의'라는 단어를 써서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아젠다로 삼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피해자'의 위치에서 발언할 것이라고 예상할 게으른 사람들의 시선, 그걸 가뿐히 뛰어넘어 전혀 다른 국면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에 만들었던 엽서. "세상이 결론지어도 너는 네 질문을 멈추지 말아 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이런 과정은 해외에도 알려졌다. 나는 우리가 한국에서 '섭식장애 인식주간'이라는 깃발을 걸고 어떤 인문사회학적 소모임을 열고 있는지, 어떤 노력을 하는 중인지를 호주 준 알렉산더 박사의 블로그(https://lifestoriesdiary.com/)를 통해 부지런히 보고했다(준 알렉산더 박사는 섭식장애 관련 책을 9권 이상 집필한 저자로서, 당사자들 이야기 쓰기와 말하기를 독려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부터 발행을 시작해 이제는 48개국 1천여 명의 연구자들에게 발송되는 마이클 르빈 교수의 섭식장애 뉴스레터 또한 내 기고글을 꼬박꼬박 중요히 다루는 중이다. 

작년 첫 인식주간의 첫 세션은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이 참여한 세션이었다. 오는 2월 28일 섭식장애 인식주간 역시 '당사자 세션'으로 출발한다. 그 이튿날(29일)은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가족 세션으로, 세 분의 용기 있는 어머니가 패널로 참여해 딸들의 섭식장애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그밖에 디지털 헬스케어, 섭식장애와 의료시스템, 자기서사의 윤리 등을 주제로 3월 5일까지 세션들이 이어진다. 

특히 이번 당사자 세션의 경우 모더레이터로 참여하는 나를 포함해 패널이 총 8명에 달한다. 첫 인식주간 때 함께했던 친구들과, 그때 관객으로 만났던 친구와, 인식주간 이후 일년에 걸쳐 인연을 맺게 된 재능 많고 영민한 친구들까지 모인 덕분이다.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다. 산소측정기가 없던 1800년대 초기 잠수함에 측정기로 태웠던 토끼의 의미를 담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이름처럼, 우리는 환자 정체성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열렬히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들로서 모이려 한다. 거식증·폭식증을 비롯한 섭식장애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구조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책 <삼키기 연습>은 이런 구절로 끝난다. 
 
"그러니 당신 자신의 이야기로
우리가 아직 틀렸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거듭 인식케 해주기를."

우리 모두에게 끝없는 듯한 과제가 주어져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 끝없이 변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에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자기 몸의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 섭식 문제에 대해 고민이 있거나 관심 있는 모든 분의 참여를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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