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군 묘역 충격 그 자체
[박용규 기자]
2024년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대사의 시작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필자는 지난 1월 13일 점심 무렵 광주동학농민혁명유족회 강성진 회장과 함께 전남 장흥군 관산읍 남송리에 위치하고 있는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을 답사하였다. 전날인 12일에는 장흥에서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창립총회가 있어서 여기에 참석하였다.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은 1894년 12월 16일(양력 1월 11일) 장흥 옥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동학농민혁명군들이 모셔져 있는 묘지이다. 일본군은 이 전투를 '옥산촌 전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무명열사묘역의 현재 모습 100여 분의 묘가 무질서하게 방치되어 있다. 2024. 1. 13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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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은 충격 그 자체였다. 묘역 안내판은 너무도 작고 낡아, 쓰인 글자를 읽기도 힘들었다. 묘역은 묘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봉분도 없고 무질서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 묘역에 100여 분의 묘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의 안내판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관산읍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
남송리 공동묘지는 옥산촌 전투에 희생된 농민군의 묘역이다. 옥산촌 전투는 퇴각농민군이 1894년 12월 16일 관산읍 옥산에 재집결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12월 15일 자울재에서 회군한 조일연합군은 관산의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솔치에서 죽천(竹川)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죽천을 넘어온 일본군에 의해 옥산촌으로 밀려 천관산을 등지고 하루 종일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과정에서 17세의 소년장수 최동린(崔東麟)이 일본군의 총에 다리를 맞아 낙마하여 학송(鶴松)에서 은신하다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
▲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 안내판 안내판이 도로 옆에 아주 작게 세워져 있고, 안내판의 글자가 너무도 작아 읽기도 힘들다. 2024. 1. 13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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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경복궁 점령 사건을 일으켜 남의 나라의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기존의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 개화파 정권을 세웠다. 1894년 경복궁 점령 사건은 남의 나라의 국권을 현저하게 침탈한 사건이었다.
계속해서 같은 해 7월 17일(양력 8월 17일)에 일본 내각은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영구히 또는 장기간 조선을 보호국으로 한다"(보호국화안)에 의결했다(무쓰 무네미쓰, <건건록(蹇蹇錄)>, 1941.) 이 날에 일본이 조선 보호국화를 결정했다. 보호국화는 식민지화를 의미한다.
1894년 9월 29일(양력 10월 27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총리대신)이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와 상의하여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이라"라는 살육 작전을 결정하였다. 이 날에 동학농민군 학살을 전담할 3개 중대 파견도 결정하였다. 같은 날 밤 9시 대본영에 있던 가와카미 병참총감이 "향후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는 명령을 조선에 있는 남부병참감부와 인천병참감부에 내렸다.
이에 맞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이 그해 9월에 일어났다. 침략자 일본군과 2차 동학농민혁명군과의 전쟁이 전개되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군 학살을 전담하는 침략자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3개 중대, 총 719명)는 세 개 방향으로 나뉘어 남하하여 내려오면서, 동학농민혁명군을 학살하였고, 동학농민혁명군을 전라도 서남해 지역으로 몰아 섬멸하는 군사 작전을 벌였다. 후비보병 19대대는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대대장이 총 지휘하는 부대였다.
1894년 10월 10일(양력 11월 7일) 미나미 고시로는 인천병참부 이토 스케요시 사령관으로부터 "조선군을 모두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후 모든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이렇게 조선 관군은 자체 군지휘권을 일본군에게 박탈당하였다. 당시 조선 관군(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교도중대)은 일본군에게 군 지휘권이 예속된 부대였다. 미나미 고시로의 동학농민혁명군 학살 작전의 명령대로 조선 관군은 동학농민혁명군을 학살하였다.
석대들 전투, 옥산리 전투에서 장흥동학농민혁명군은 침략자 일본군과 싸웠고,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침략자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정예군이었고, 스나이더 소총·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6초에 1발이 나갔고, 사정거리가 1000m, 유효사정거리가 900m였다. 900m 이내에서 총에 맞으면 즉사하였다. 일본군 후비병은 3년의 현역과 4년의 예비역을 모두 마친 자 가운데서 뽑힌 병사여서, 사격이 뛰어난 역전의 정예 병사들이었다.
반면에 동학농민혁명군은 화승총·창·칼·죽창 등을 소지하였다. 화승총은 유효사정거리가 50∼80m에 불과하였다. 창·칼·죽창은 근접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오합지졸의 비정규군이었다.
그러나 쿠스노키 비요키치(楠美代吉) 상등병이 <종군일지>에서 1894년 12월 12일(양력 1895년 1월 7일)에 기술하고 있듯이, 장흥동학농민혁명군은 제 나라를 보위하고 침략자를 몰아내고자 "밤새도록 횃불을 밝히고 때때로 대포를 발사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밤을 새우는" 농민 병사들이었다.
1894년 12월 14일(양력 1월 9일)에 있었던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일본군과 일본군에 예속된 조선 관군(통위영병, 교도중대)은 동학농민혁명군 수백 명을 학살하였다. 후비보병 제18대대 제1중대 시라키 세타로(白木誠太郞) 중위와 후비보병 제19대대 1중대 2소대장 구스노 나리도시(楠野成俊) 소위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을 지휘하였다[쿠스노키 비요키치(楠美代吉), <종군일지>(1895년 1월 9일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같은 해 12월 15일(양력 1895년 1월 10일) 장흥에 후비보병 제19대대 3중대(221명) 이시쿠로 아키마사(石黑光正) 대위가 도착하여 장흥 남면(현재 용산면) 지방으로 퇴각한 동학농민혁명군 압살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일본군 제1중대(지휘관은 구스노 나리도시(楠野成俊) 소위)는 좌측지대가 되고, 일본군 제3중대(지휘관은 이시쿠로 아키마사(石黑光正) 대위)는 별동대가 되며, 일본군 시라키 세타로(白木誠太郞) 중위는 우익 지대가 되며, 후비보병 제18대대 제1중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가 이끄는 부대는 중로분진대가 되어, 동학농민혁명군을 압살하면서 나아가도록 하였으며, 각 부대 집합지는 장흥 대흥면(현재 대덕읍과 회진면)으로 정했다. 이 압살 작전에 일본군에 예속된 조선 관군(통위영병, 교도중대)이 합세하였다.
참고로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는 장흥과 해남, 진도 등에서 동학농민혁명군 학살을 자행하였고,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도 가담하였다. 미야모토 소위는 을미사변에서 조선의 궁내부 대신인 이경직에게 처음 총을 쏜 자였고,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일본군의 장흥 남면 동학농민혁명군 압살 작전 시기에 옥산리 전투가 있었다. 옥산리(玉山里, 현재는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전투는 1894년 12월 16일(양력 1895년 1월 11일)에 있었다. 석대들 전투에서 퇴각한 장흥동학농민혁명군 4000∼5000명이 옥산리에서 진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대포를 쏘고 있었다.
압살 작전을 수행하던 일본군 시라키 세타로(白木誠太郞) 중위가 이끄는 부대가 이날 오후 4시경 고읍(古邑, 현재는 관산읍) 죽천시(竹川市, 대내장(竹川場)으로도 부름)에서 선발대로 있던 장흥동학농민혁명군 3백여 명과 마주치자 바로 공격해 제압하였다. 수 분 만에 장흥동학농민군 선발대는 본대가 있는 옥산리로 물러났다.
시라키 세타로(白木誠太郞) 중위가 이끄는 부대는 일본군과 교도중대의 2개 소대(약 170명)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도중대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일본군이 훈련시켜 양성한 부대였다. 일본군 제18대대 시라키 세타로(白木誠太郞) 중위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와 하사관이 교도중대를 이끌었다. 교도중대의 중대장은 이진호(李軫鎬)였는데, 미나미 고시로 대대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친일 인사였다. 일본군과 교도중대는 모두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정규군이었다.
옥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를 때 장흥동학농민혁명군의 지휘관은 17세의 최동린(崔東麟, 최동(崔童)으로도 표기)이었다. 최동린은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는데, 일본군이 그를 저격해 총탄이 다리를 관통해 낙마시켰다. 최동린 옆에 있던 동료가 그를 부축해 물러났다.
12월 16일에 있었던 옥산리 전투에서 시라키 세타로(白木誠太郞) 중위가 지휘한 일본군과 교도중대에 의해, 장흥동학농민혁명군 100여 명이 총살되었고, 20여 명이 생포되었다. 생포된 20여 명 가운데 10여 명이 다시 총살되었다. 옥산리 전투가 있던 날에 큰 눈이 내렸고, 눈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큰 눈에 덮인 장흥동학농민혁명군 100여 명의 시신이 근처 관산읍 남송리에 모셔졌다. 바로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이다.
▲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무명열사묘역 봉분이 허물어져 있어, 보기에도 민망하다. 2024. 1. 13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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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에 있는 분들은 당시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보호국화 책동에 분연히 맞선 항일 순국열사들이었다. 항일 순국열사를 독립운동가라고 역사학계는 규정한다. 항일 순국열사들의 묘역은 독립보훈에 해당하니 국립묘지급으로 예우해야 한다.
우선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 안내판이라도 크게 세워 우리 국민들이 묘역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게 조치하여 주기를 바란다. 다음으로 장흥에 호국원이 건립된다고 하는데 남송리 장흥동학농민혁명군 묘역도 호국원 수준의 묘역으로 정비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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