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제조의 선구자 최무선

김삼웅 2024. 2. 1.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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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74] 최무선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최무선 과학관 계단에 부착되어 있는 최무선 부조
ⓒ 정만진
 
건국초기에 기상이 팔팔했던 고려왕조는 묘청·정지상 등의 개혁 세력이 패퇴한 이후 보수적인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1170년 정중부를 시작으로 무신난이 이의방·경대승·최충헌·최우로 이어지고 무인들이 권력을 탈취하였다. 여기에 중원을 장악한 몽고군의 1차 침입(1231년)으로 시작된 몽고(원)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남쪽에서는 틈을 노린 왜구가 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 어디에도 기댈 언덕이 없었다. 부처의 힘을 빌어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대장경 조판 작업을 시작하였다. (1236년) 무인정권이 60여 년간 지속되었으나 국가안보나 민생을 뒷전이고 대를 이어가면서 권력놀음에만 빠졌다. 이규보 등 어용문인들이 '태평성대'를 노래했다.

최무선(崔茂宣,?~1395)은 경북 영천에서 관리인 최동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나면서 병법에 관심이 많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다. 이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하면 왜구를 물리칠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그는 해마다 널리 행해져 오고 있던 연등회놀이 가운데 횃불놀이를 통해 불의 위력을 알게 되었고, 석전(石戰)을 통해 어떻게 하면 무거운 돌이 멀리 날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공민왕 10년(1361) 10월 홍건적의 난이 있자 임금과 조정이 안동으로 한 때 피난을 하였다. 이때 최무선도 개경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는데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하루속히 화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최무선은 적을 일거에 격퇴할 수 있는 포를 만드는 길만이 고려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양태진, <인물로 본 한국 영토사>)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화약이 제조되고 금나라·원나라로 이어졌다. 하지만 중국은 그 제조법을 극비에 부치고 있어서 기술의 외국 유출을 금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화약은 이미 송·원 대에서 전쟁에 사용되었으나 그 제법이 극비에 부쳐졌기 때문에 고려에는 전래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화약이 전래된 것은 우왕 3년(1377)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 시기를 최무선이 화약과 화기를 제조한 시기로 보아야 하겠고, 따라서 화약·화기가 전래된 것은 공민왕 대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이현희, <최무선>, <인물한국사2>)
 
 최무선을 기려 세워진 비가 과학관 뜰 앞에 있다.
ⓒ 정만진
 
최무선은 화약을 제조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제조하는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다.

그의 집에는 아버지가 강흥참사여서 외국과의 교역 품을 취급하는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 등 외국인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최무선은 화약을 만드는 기술을 이들을 통해 알고자 하였다. 그의 집을 드나드는 인물 가운데 중국 강남에서 상거래차 드나드는 이원(李元)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스스로 화약을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최무선은 이원을 극진히 접대하면서 환심을 사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이원이 어느날 밤에 조용히 최무선을 불러놓고 느닷없이 좋은 붓을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중략)

실은 자기도 화약을 만드는 제조법을 자세히는 모르고 다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어깨 너머로 만드는 것을 보았을 뿐이라고 하면서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음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최무선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 이 붓 속에 있으니 참고하라고 목소리를 죽여 가면서 말하는 것이었다.(양태진, 앞의 책)

최무선이 꺼내 본 붓속에는 종이가 실처럼 꼬아져 있었고, 내용인 즉 화약제조법이었다. 그는 자기집 뒤뜰에 숯가마 비슷한 것을 만들어 놓고 쇳물을 녹여 실험을 거듭하여 나이 50살이 된 우왕 2년(1376) 화통(火筒)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최무선은 조정에 화약제조 방법을 알아냈다고 보고하고 실용화를 건의했지만 관리들은 신뢰하지 않았다. 왜구의 침범은 더욱 잦아지고 왜구는 대형화 부대여서 토벌이 쉽지 않았다. 몇 차례 시범 끝에 마침내 우왕 3년 10월 최무선을 제조관으로 하는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

우왕 6년(1380) 8월, 왜구는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적인 침입을 감행하였다. 먼저 왜선 500척은 진포(금강 어구)에 들어와 큰 밧줄로 배와 배를 서로 움직이지 못하게 연결시켜 놓은 뒤 군사를 나누어 배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대부대는 육지에 상륙하여(중략),

이에 조정에서는 전부터 들려오던 최무선이 제조한 화기를 이 기회에 쓰도록 원수 나세 (羅世)에게 명하였다. 나세는 심덕부·최무선 등과 같이 전함 100척을 이끌고 최무선이 제조한 각종의 화기를 싣고 진포로 급거 출동하였다. 이때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동하였으며 그가 몇 해 동안 고심초사한 끝에 만들어 낸 여러 가지 화기·화약을 왜구 격퇴에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어(중략), 왜선을 향하여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발포하였다. (중략) 눈 깜짝할 사이에 50여 척의 왜선은 불에 타버렸고, 왜구들은 화장 또는 수장되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다.(이현희, 앞의 책)

역사에 가정이 허용된다면, 최무선의 화약제조와 실용화가 없었다면, 500여 척을 몰고 온 왜구가 고려를 송두리 채 짓밟았을 지 모른다. 그는 1396년 이태조 5년 병환으로 숨지면서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고려의 녹을 받아 살아온 가문으로서 차라리 장사꾼 노릇을 할망정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 이성계가 나라를 새로이 열개됨은 어쩔 수 없는 천명이겠으나 신하로서 왕을 죽이고 왕씨까지 몰살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무선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정승 수성부원군으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에게는 군기소감 벼슬을 내렸다. 아들 최해산은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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