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공부하지 말고 시험공부하라고?
“시험 잘 보고 싶다면, 시험공부를 하라.”
한 소셜미디어에서 ‘전직 의대생’이라고 밝힌 이용자가 자신의 공부법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그의 공부법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먼저 ‘족보’(기출문제)를 구해 수업 자료에 표시하며 예습한다. 수업에서 교수가 해당 내용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체크한다. 이렇게 파악한 주요 내용을 열심히 외운다.
공부 좀 한다는 소릴 들어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요령을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취업준비생 시절 도무지 오르지 않는 토익 점수 때문에 찾아간 학원에서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영어를 잘하려 들지 말아라. 필요한 건 토익 점수지 영어 실력이 아니다.” 강사는 의문부사로 시작하는 질문이 나오면 ‘예(yes)’ 혹은 ‘아니오(no)’로 시작하는 보기를 제외하라는 식의 요령을 알려주었고, 성적은 두 달 만에 급상승했다.
실력은 실전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기업이 지원자가 영어로 대화하는 실제 상황을 보기란 쉽지 않다. 대학 역시 지원자의 평소 공부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게 시험이다. 시험 결과로 그 사람의 실력을 가늠하려는 취지다. 하지만 지원자 입장에선 실력보다 시험 성적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공부하지 말고, 시험공부를 하라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시험을 잘 설계해야 한다. 토익 점수는 높았지만 영어 인터뷰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경험을 비춰보면, 성적이 늘 실력을 반영하는 건 아니다. 실력과 상관없이, 혹은 실력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는 요령이 있기 때문이다. 연간 26조 원 규모(2022년)의 초중고 사교육 시장이 건재한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국내 손꼽히는 거시경제학자 김세직 서울대(경제학) 교수가 입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는 한국의 장기경제성장률이 1990년대 이후 5년에 1%씩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술 격차가 작아지는 게 원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과 20년 이상 기술 격차가 있어 특허가 만료된 기술을 베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격차가 20년 안쪽으로 들어오자 더는 베낄 게 없어졌다. 새로운 걸 만드는 것 외엔 성장할 방법이 없다. 창의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한국의 시험은 창의성이 높은 사람이 높은 점수를 받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최근 만난 사교육업체 관계자는 “수학을 잘하게 하는 게 아니라 수학 문제를 잘 풀게 하는 게 (교육) 목표”라고 말했다. 공부 말고 시험공부를 하라는 조언이 넘쳐나는 시대, 사교육 기관 입장에서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 선택을 하는 개인을 탓해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개인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1%대 경제성장률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시험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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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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