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대 0’ 월드컵 꼴찌의 우승…트랜스젠더가 만든 기적 실화

나원정 2024. 2.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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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넥스트 골 윈즈’

■ 문화 비타민

「 젠더 이슈가 뜨거운 현대(?) 사회. 남태평양 사모아 문화에선 예부터 성별이 2개가 아닌 4개였습니다. LGBTQ는 최근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인류학적 근거가 있는 걸까요. FIFA 최하위 ‘미국령 사모아’가 38연패 행진을 마감한 데엔 ‘파파피네(남자의 신체로 태어났지만 여성적 특징을 갖는 이)’가 있었습니다. ‘꼴찌 반란’ 실화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토마스 롱겐 코치(가운데)로 변신한 배우 마이클 패스밴더.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남태평양 폴리네시아계 민족인 사모아인은 전통적으로 성별을 네 가지로 나눈다. 여성, 남성, 파파피네, 파파타마. 그 중 파파피네(fa’afafine)는 ‘여성의 방식으로’라는 뜻이다. 남자 신체로 태어났지만, 여성의 특징을 갖고 사는 경우다. 파파타마는 그 반대다. 2011년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최하위 미국령 사모아는 국가대표 경기(A매치) 38연패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역사적 승리의 주역 중에 파파피네가 있었다. 마블 수퍼히어로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 ‘토르: 러브 앤 썬더’(2022)로 유명한 뉴질랜드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의 신작 ‘넥스트 골 윈즈’(지난달 24일 개봉)는 미국령 사모아 대표팀과 파파피네 선수 자이야 사엘루아가 만들어낸 ‘꼴찌의 반란’ 실화가 토대다. 당시 이들을 이끈 건 미국 프로축구(MLS)에서 퇴출당한 네덜란드계 미국인 토마스 롱겐 감독이었다.

영화 ‘넥스트 골 윈즈’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 실화 주인공인 트랜스젠더 축구선수 자이야 사엘루아, 토마스 롱겐 감독(오른쪽부터). [EPA=연합뉴스]

이들의 인간 승리를 이해하려면 미국령 사모아의 축구 역사부터 얘기해야 한다. 미국령 사모아 축구는 1983년 남태평양게임을 통해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미국령 사모아는 1994년 FIFA 회원국이 됐고, 이후 월드컵 오세아니아 예선에 참가했다. 그리고 2001년 4월 열린 2002 한·일월드컵 오세아니아 예선에서 호주에 0-31로 졌다. 이는 FIFA 역사상 A매치 최다 점수 차 경기다. 미국령 사모아 선수들은 수퍼마켓점원, 경찰관, 화가 등 생업이 따로 있었다. 또 ‘성스러운’ 일요일에는 절대 훈련하지 않는데, 사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2014 브라질월드컵 오세아니아 예선 시작 3주 전인 2011년 부임한 롱겐 감독에게 이 모든 상황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논바이너리 배우 카이미나(가운데)가 트랜스젠더 축구선수 자이야를 연기했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엑스맨’ ‘노예 12년’의 유명 할리우드 배우 마이클 패스밴더가 분노 조절 문제를 가진 롱겐 감독 역을 맡았다. 대개 이런 스포츠 영화에선 열정적인 지도자가 강한 훈련을 통해 오합지졸 팀을 승리로 이끄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다. ‘축구 기계’ 같던 롱겐 감독이 처음에는 넌더리 쳤던 선수들에 의해 변화한다. 첫 승리도 롱겐이 현지 문화와 정서를 깨달은 순간 찾아온다. 팀의 유일한 파파피네이자 월드컵(예선)에 출전한 최초의 트랜스젠더 선수로 기록되는 자이야 사엘루아(배우 카이마나가 연기)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서다.

2001년 호주 팀에 미국령 사모아가 대패한 경기를 보도한 미국 지역 신문 매리언 스타.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전체가 승부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스포츠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 여정이다. “승리를 위해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게 우리의 전통”이란 대사가 바로 주제다. “딱 한 골만 넣자”고, 그게 안 되면 “함께 지자”고 서로를 보듬자 아무리 해도 ‘마음이 안 동하던’ 첫 승리를 거두게 되는 배경도 기상천외하다. 39연패 직전 롱겐 감독의 아픈 개인사를 알게 된 선수들이 “그를 위해서라도 승리하자”고 제대로 의기투합하면서 결승골이 터진다. 팀에서 행운의 여신, 꽃과 같은 존재로 존중받던 자이야는 롱겐 감독의 전투적인 축구를 만나 기량이 폭발한다. 롱겐의 경직됐던 축구 철학을 인간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 게 자이야다. 실제의 자이야 사엘루아는 그 이후 선수 겸 LGBTQ+ 선수들을 위한 FIFA 홍보대사로 활약 중이다.

‘넥스트 골 윈즈’의 와이티티 감독도 뉴질랜드 원주민 혈통(마오리족 혼혈)이다. 자이야 같은 파파피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지 문화를 가리켜 그는 “(성별의) 차이에 관해 토론하는 것보다 튀겨야 할 더 큰 물고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들의 문화가 갈등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의미다. 인종·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주류 문화에 대한 뼈있는 농담이다. ‘넥스트 골 윈즈’의 해피엔딩은 현실로 이어진다. 영화 말미에 잠깐 등장한 실제의 자이야는 지금도 미국령 사모아 대표선수로 뛰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롱겐 감독은 최근 미국 잡지 에스콰이어 인터뷰에서 “2026 북중미월드컵을 앞두고 미국령 사모아 대표팀 감독 복귀 요청을 받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포츠에서 진짜 성공은 모두가 한 팀이 돼 경기를 즐기는 그 자체 아닐까. 미국령 사모아 대표팀이 알려준 인생 승리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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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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