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판사의 힘

문병주 2024. 1. 3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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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어수선하다. 5년여간의 수사ㆍ재판 결과 47개 혐의 모두 무죄판결 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선고, 정치인들 재판을 둘러싼 논란이 크다. 여기에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첫 정기인사를 앞두고 법복을 벗은 판사들이 과제를 남겼다. 특히 연간 1∼2명 수준이던 고등법원 판사 퇴직자가 2022년 13명, 지난해 15명으로 늘더니 올해 역시 수도권에서만 10명 넘었다. 고법 부장판사 3명도 사표를 제출했다.

엑소더스는 예고된 현상이다. 과거 판사의 직책은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이나 단독재판부를 거쳐 고법 배석이 되고, 이후 지법 부장 근무 후 고법 부장, 그리고 지법원장ㆍ고법원장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ㆍ관료적 시스템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법과 고법 인사를 이원화하면서 고법 판사를 따로 임용하는 제도가 생겼다.

일명 ‘10조 판사’(법관인사규칙 10조에 의해 선발)인 고법 판사는 일반적으로 지법 부장판사가 될 정도의 경력을 갖춘 이들이 후보다. 지법 판사처럼 여러 지방을 떠돌지 않고 서울과 수원 고법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이 두 고법 임용에 많이 지원한다. 하지만 근래 지방 고법의 인력난으로 인해 지방 순환 근무가 당연시됐고, 그만두는 이들도 대부분 지방 인사가 날 순번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고법 부장 승진제도가 없어져 직책 상승이라는 유인마저도 없다 보니 “앞길이 막막하다”며 새로운 길로 눈을 돌리게 된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이런 현실을 파악한 듯하다. 26일 실시된 임기 후 첫 고법 판사 인사에서 지방권으로의 이동을 지난해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시무식사를 하고 있다. 그는 취임 후 첫 시행한 법관 인사에서 지방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폐지하고 수도권 고법판사들의 지방순환 근무를 축소했다. 연합뉴스


정년이 차지 않은 고법 부장들의 사퇴도 문제다. 이들 자리는 지법원장이 되는 관문이었지만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9년부터 고법 부장 승진제를 폐지하고, 이미 승진한 이들은 지법원장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제도 변화를 통해 기존 고위 법관들의 입지를 축소하고, 김 전 대법원장에게 유리하게 법원조직을 구성했다.

물론 고법 판사들의 이탈을 지위 상승에 대한 기대감 저하, 경제적 여건 악화, 자녀 교육 문제 등 현실적 이유로만 설명하긴 어렵다. 치열한 법 공부와 경쟁을 거쳐 법복을 입는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위라는 명예, 법치를 통해 사회적 정의를 지킨다는 사명 의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런 명예의식과 사명감의 저하가 중견 판사들의 변호사행을 부추기고 있는 근본적 원인이 아닐까. 우려는 법원의 허리로 여겨지는 판사들의 사퇴가 현재 법원의 가장 큰 난제로 지적되는 신속한 재판을 더 힘들게 만든다는 데 있다. 재판이 제대로 진행 안 되니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판사들의 사기도 떨어진다. 그러면서 법관들의 이탈이 늘고, 재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 수도권 고법 판사들 무더기 사표
소속감 줄고 사명감 약화 분위기
행정개선, 국민 공감 재판 늘어야

‘사법농단’이라는 험악한 수식어를 앞세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전직 법원 고위 인사들에 대해 장기간 진행된 수사와 재판 역시 영향을 주진 않았을까. 수사의 시작에 ‘사법적폐 청산’이라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일성이 있었고, 사법부 내부 조사 결과를 무시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의 자발적 협조가 뒷받침했다. 기존 사법행정 시스템을 적폐로 몰고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 진정한 사법개혁보다는 판사들의 한숨과 좌절만 늘리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청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박수를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판사들 사이에서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말을 빌려 현실을 자조하는 소리도 들린다. “의회는 돈지갑(예산권)이 있고, 정부는 칼(집행 강제력)이 있는데, 사법부는 이에 견줄 만한 권력이 없다. 단지 판단만 한다.”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 제대로 재판해야만 진정한 삼권분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지만 정치에 종속된 듯한 사법부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로 회자한다.

사법부의 위상이 과거 같지 않다는 말이 들리는 시대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법원과 판사의 올바른 역할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지난 24일 사회초년생 200여 명을 상대로 전세 보증금 사기행각을 벌인 이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재판이 있었다. 재판장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들을 만든 것이지 결코 여러분이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달라”는 당부로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건네고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법대 위에 앉아 재판 지연에 대한 자기 변론을 늘어놓는 식의 태도가 아닌 이런 말 한마디에 국민은 신뢰를 보탠다. 칼도 없고 지갑도 없지만 판사의 진정한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글=문병주 논설위원, 그림=이유정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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