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보이스 피싱' 당한 것도 억울한데…상처난 마음에 소금 뿌리는 2차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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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민 덕희'에서 덕희(라미란)는 보이스 피싱 피해자다.
때로는 피해자의 주변인이 가장 가혹한 2차 가해자가 된다.
"최근 범죄 피해 뒤 2차 가해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공군 병사의 사례와 같이, 범죄 피해의 영향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피해자가 2차 가해로 회복의 동력을 잃고 좌절하거나 목숨을 끊는 일이 지금도 반복해서 일어난다. 더욱 안타까운 건 2차 가해자 대부분이 자신의 행위가 2차 가해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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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 경각심 높여…회복 위한 연대 강조
영화 '시민 덕희'에서 덕희(라미란)는 보이스 피싱 피해자다. 절박한 마음에 대출 수수료를 먼저 보냈다가 화를 당한다. 그는 은행에서 사기임을 깨닫고 실신한다.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경찰에서 수사를 등한시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일관하며 업신여긴다. "보이스 피싱 당한 금액이… 3200(만 원)이요? 입금을 여덟 차례나 하셨네?" "제가 돈이 좀 급했어요." "아무리 돈이 급해도 여덟 번이나 달라는 데 그걸…. 답답하시네, 정말." "집에 불나 봤어요? 전 재산이 다 탔는데 보험도 안 돼, 생계도 끊겨. 길거리에 나앉아 봤어요?"
보이스 피싱은 해마다 정교하게 진화한다. 대출 기록 등 정보를 손에 쥐고 법률, 금융, 수사 용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실존하는 은행과 수사기관 부서·관계자 등 이름을 밝히고, 발신 번호도 조작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보이스 피싱에 당하겠어?" 같은 생각으로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박영주 감독은 "보이스 피싱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악질적 범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경각심만 일깨우는 영화는 아니다. 본질은 따로 있다. 바로 피해자에게 자행되는 2차 가해다. 많은 피해자는 적어도 형사사법기관과 주변 사람만큼은 자신의 지지망이 되어주리라고 확신한다. 이론상 이런 믿음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때로는 피해자의 주변인이 가장 가혹한 2차 가해자가 된다.
범죄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확증 편향적 태도로 무장한 채 사건을 재해석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범죄를 당해도 마땅한 사람으로 인식되곤 한다. 평소 또렷했던 기억도 참고인으로서 증언을 요청하면 흐려진다. 정의롭고 공정한 듯 행동했던 사람은 자신이 받을 불이익이 두려워 비굴해지며, 그렇게도 공감적이었던 사람 또한 자기 보호를 위해 냉담해진다.
덕희에게는 박형사(박병은)가 2차 가해자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사를 차일피일 미룬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 몰두한 나머지 절박한 하소연을 나 몰라라 한다. "아니, 아까 저 사무실 못 봤어요? 100억 원짜리 터져서 지금 다들 정신 나갔다고. 피해자들 울고불고, 내가 그걸 다 수습해야 해요." "나도 피해자예요. 예? 큰 피해자, 작은 피해자 따로 있는 거 아니잖아요."
2차 가해는 범죄만큼 심각한 문제다. 통상 가해자가 여러 명이며, 일상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된다. 김태경 서울동부스마일센터 센터장은 저서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 "범죄 발생을 막는 것보다 2차 가해를 막는 것이 훨씬 쉬울 수 있음에도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범죄 피해 뒤 2차 가해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공군 병사의 사례와 같이, 범죄 피해의 영향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피해자가 2차 가해로 회복의 동력을 잃고 좌절하거나 목숨을 끊는 일이 지금도 반복해서 일어난다. 더욱 안타까운 건 2차 가해자 대부분이 자신의 행위가 2차 가해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피해자를 방해하는 요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리적 안정을 되찾고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 다수 보고에 따르면 형사사법 절차에 많이 관여할수록 스트레스도 늘어난다. 피해자가 주변인으로 진술을 강요당하면서 수사 절차에 따른 피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까닭이다. 몇 년이 지나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겨우 재건한 삶의 구조가 흔들리는 경우도 적잖게 발생한다.
'시민 덕희'는 지극히 피해자의 시각에서 범죄 사건을 조망한다. 그들을 공동체 일원으로서 보호하고 지원할 방법으로 연대를 가리킨다. 직장 동료인 봉림(염혜란), 숙자(장윤주) 등은 덕희를 불쌍하거나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다. 동료이자 이웃이자 사회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대한다. 일상적으로 활동할 삶의 틀을 제공해 심리적 혼란을 줄여주고 통제감을 유지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피해자 회복의 중요한 밑거름이 아닐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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