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찾아낸 위대한 발견
[이준목 기자]
'방사능의 어머니'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흔히 '퀴리 부인'이라고도 불리우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로 꼽힌다. 여성들의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태어나 활동했음에도, 과학분야에서 최고의 영예인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며,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두 번이나 수상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마리를 비롯하여 그녀의 가족과 후손들이 획득한 노벨상만 무려 6개에 이른다. 세계적인 과학 명문가로 자리매김한 퀴리 가문의 업적은 인류의 생활과 역사를 바꿔놓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작 그 댓가로 마리와 그 가족들은 영광만큼이나 혹독한 비극 또한 치러야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 tvN |
1월 3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6회는 '노벨상만 6개, 마리 퀴리 가문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편을 통하여 마리 퀴리의 일대기와 업적을 조명했다. 박민아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마리 퀴리는 1867년 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바르샤바의 한 교육자 집안에서 1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폴란드어로 마냐 스콰도프스카였다. 그녀는 과학 선생님이었던 부친 브와디스와프 스콰도프스키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다양한 실험기구들을 접하며 과학과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신동으로까지 불린 마리는 한번 읽은 책은 모두 기억했다고 하며, 학년을 2년이나 월반했음에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수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마리는 8세에 큰 언니를, 10세에 어머니를 각각 전염병으로 잃는 아픔을 읽었다. 설상가상 부친도 실직을 하게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퀴리는 몇 번이나 학업을 포기할뻔한 고비를 겪어야했다. 만일 그녀가 이때 동시대 여성들처럼 평범한 결혼을 선택하거나 학업의 꿈을 접었다면, 훗날 위인전에 등장하는 '퀴리 부인'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본래 마리의 꿈은 대학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남녀차별이 만연했고 여성의 지위는 열악했다. 대학은 남성들만 가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깊게 박혀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던 마리는 폴란드를 떠나 여성의 대학입학이 허용되던 프랑스로의 유학을 선택했고, 학비를 벌기 위하여 무려 5년이나 가정교사로 일을 해야만 했다.
24세의 마리는 프랑스의 명문 소르본 대학의 자연과학부에 입학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과학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 인데다 남학생들보다 월등하게 똑똑했던 퀴리는 주변 남학생들의 질시와 텃세를 한몸에 받아야 했다.
마리는 열악한 다락방에서 거주하며 가족들이 보내준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묵묵히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에만 매진했다. 결국 마리는 소르본 대학 역사상 여성으로는 최초로 물리학 학사시험 수석, 수학 학사시험 차석을 차지한다.
27세가 된 마리는 훗날 반려자가 되는 8세 연상의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된다. 당시 피에르는 이미 전자기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던 물리학자였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열혈 과학 덕후'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사랑에 빠지게 됐다. 두 사람은 1895년 7월, 결혼에 골인하고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퀴리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과학자 커플답게 이들의 연애와 결혼스토리도 남달랐다. 화려한 결혼식이나 웨딩드레스를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평상복에 가까운 어두운 색의 의상을 입고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소박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은 목적지를 따로 정해놓지 않은 무계획의 자전거 여행으로 대체했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기간에도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과학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가정을 꾸리고 안정을 찾은 마리는 본격적으로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마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이자 본인의 스승이었던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 물질에서 찾아낸 정체불명의 '광선'에 관심을 갖게됐다. 당시의 과학계는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광선들의 존재 유무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화두였다. 마리는 우라늄외에도 다른 물질에도 광선이 나올까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다가 '광선은 하나의 물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는 자발적으로 주변에 에너지를 배출하는 광선이라는 의미에서 방사선(放射線, radioactive ray, strahlung)과 방사능(放射能, Radioactivity)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개념을 최초로 정립해낸다. 또한 1898년에 이르러 퀴리는 남편 피에르와 함께 연구를 거듭하다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원소이자 우라늄보다 높은 방사능 수치를 지닌 2개의 새 원소, 폴로늄(Polonium)과 라듐(radium) 을 발견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물질의 발견은 곧 새로운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지곤 했다. 퀴리 부부가 이뤄낸 방사선의 개념 정립과 새로운 원소들의 발견은, 인류가 새로운 문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됐다. 퀴리 부부의 연구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은 방사성 원소를 찾는 연구를 이어다가 핵분열(Nuclear fission)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1945년 핵무기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핵폭탄과 원자력 발전의 시초가 마리의 발견에서 시작된 셈이다.
1903년 퀴리 부부는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나란히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본래 노벨위원회는 남편 피에르에게만 상을 수여하려고 했다. 이에 피에르는 거듭 탄원서를 보내어 아내가 공동 수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위원회는 치열한 공방 끝에 결국 마리 역시 함께 수상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로써 마리는 36세의 나이에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수적인 학계와 일부 언론에서는 여성 과학자로서 마리의 독자적인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들은 여성인 마리가 기껏해야 조수 정도의 역할이나 했을 것이라며 '남편 잘 만나서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비아냥거렸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피에르가 아내의 명성에 묻혀져서 주목을 덜 받게 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당시 피에르는 마리보다 훨씬 더 명성을 떨치고 있던 걸출한 과학자였다. 당대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모른척하고 노벨상의 영광을 혼자 독점하는 것도 욕심을 부렸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는 주변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고 아내이자 동료 과학자인 마리를 평생 진심으로 존중하고 아꼈다. 마리가 오늘날까지 세계 과학계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과학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데는 이러한 피에르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노벨상을 수상하고 3년 후인 1906년 4월 19일, 마리의 인생을 뒤흔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가장 믿음직한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남편 피에르가 불의의 사고로 결혼 11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대학으로 출근하던 피에르는 길을 건너다가 술에 취한 마부가 몰던 마차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했다. 오늘날로 치면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였다.
마리는 큰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졌다. 마리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쓴 글에서 "피에르, 당신이 없는 삶은 잔혹해요. 고통으로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고 내 삶이 끝나버릴 것 같아요. 저많은 마차중에 내 님이 맞은 운명을 내게도 안겨줄 마차가 있지 않을까요"라며 비통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슬픔에 잠겼던 마리는 가장으로 남겨진 두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마음을 다잡었다. 퀴리는 남편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물리학 교수 자리를 이어받으며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교수가 됐다. 홀로서기에 나선 마리는 묵묵히 방사선 연구를 거듭했고, 최초발견 이후 약 10년만에 순수한 라듐 추출에 성공한다. 마리가 찾아낸 라듐은 오늘날 항암치료에 주로 쓰이는 방사선 치료의 문을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과학자 정신이 투철했던 마리는 라듐 연구를 이용하여 특허를 신청하면 큰 수익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아무 대없이 추출법을 세상에 공개했다. 라듐은 환자 치료에 사용되어야지 이익을 얻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녀의 신념이었다. 마리의 결단으로 인하여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용화된 라듐은 의학 등 각종 산업에 만병통치약으로 불리우며 열풍을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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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리의 선한 의도는 생각지도 못한 후폭풍도 동시에 불러왔다. 당시만 해도 방사능 연구가 극초창기라 방사능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위험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시절이었다. 연고-치약-성냥-초콜릿-화장품-의류-콘돔 등 다양한 생필품에서 음식에 이르까지 라듐 제품들이 출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사태가 벌어졌다.
라듐의 위험성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1920년대 미국의 시계공장에서 근무하던 어린 소녀들이 시계에 형광 기능을 가진 라듐을 칠하는 업무를 장기간 하다가 방사능에 피폭되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또한 1930년대에는 에벤 바이어스라는 사업가가 부상 치료차 라듐 생수를 4년간이나 복용했다가 뼈에 축적된 라듐으로 인하여 턱이 괴사되고 고통속에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마리 역시 인류를 위하여 특허까지 포기했던 라듐이 정작 인류에게 큰 해를 끼칠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1911년, 마리는 라듐 추출에 성공한 업적을 인정하며 생애 두 번째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번에는 남편 피에르도 없이 혼자서 이뤄낸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리의 노벨상 수상은 또다른 구설에 휘말리게 된다. 바로 그녀의 사생활을 둘러싼 불륜설 때문이었다.
마리는 피에르 사후 프랑스의 물리학자였던 폴 랑주뱅이라는 인물과 가까워진다. 문제는 랑주뱅이 이미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던 데다가, 심지어 남편 피에르의 제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프랑스 신문 '뢰브르'에는 마리가 랑주뱅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폭로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아이를 또 낳는다면 나는 당신과 헤어질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인생과 지위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지만, 모욕을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불륜을 저지른 상간녀가 상간남에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본처와 잘 지내지 말라고 협박하는 듯한 내용은 여론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편지 내용의 진실과 각색 여부는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마리와 절친했던 후배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마리를 위로하며 불륜설은 저열한 언론이 만든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마리를 변호해주다가 "마리는 여성적 매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불륜은 거짓"이라면서 본의아니게 옹호를 빙자한 디스를 저지르기도 했다고.
진실 여부를 떠나 마리의 불륜 의혹은 그녀 인생에 최대의 흑역사로 남았다. 불륜설은 언론을 통하여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 대대적으로 퍼졌고, 마리에게는 대중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견디다 못한 마리는 결국 랑주뱅과 결별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피신을 떠나야 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여성 과학자라는 이유로 과장된 가짜뉴스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난처해진 노벨위원회는 노벨상 수상 철회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 마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노벨상 시상식에 참가하지말고, 스스로 상을 먼저 거절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는 "노벨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는 것"이라면서 당당히 시상식에 참석했고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마리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1914년 1차 세게대전이 발발하자 마리는 엑스레이 진단법과 해부학을 배운뒤 개조한 구급차 '리틀 퀴리'를 다수 제작하여 직접 몰고 전장을 누비며 부상자 치료와 구호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라듐 연구에 몰두했다. 마리는 과학자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우대했던 미국으로 건너가 대대적인 환대와 지원을 보장받았다. 그동안 마리를 박해해오던 프랑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프랑스 정부는 퀴리에게 1923년부터 종신 연금을 보장하기로 결정했고, 최고훈장까지 수여하려했지만 이는 마리 본인이 사양했다.
안타깝게도 마리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누구보다 가까이서 방사능을 연구해온만큼 마리 역시 다른 피해자들처럼 자연스럽게 피폭에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학계에서는 먼저 사망한 남편 피에르 역시 공식적인 사인은 마차사고였지만, 사고 직전에 이미 방사능 피폭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제때 마차를 피하지 못한 것이 사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리 역시 50대 이후 방사능 피폭의 영향으로 이명과 백내장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신체 기능 곳곳이 망가져서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한다. 요양원을 전전하던 마리는 결국 1934년 7월 4일 세상을 떠났고 병명은 '재생불량성 빈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방사능에 고도로 노출된 환경에서 살았음에도 정작 마리의 수명은 향년 66세로 당대 여성 평균 수명보다는 훨씬 높았고 남편보다는 무려 28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이다.
마리는 사후 남편 피에르와 함께 프랑스의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묻혔다. 사망하고 나서도 시신에 방사능이 검출되며 그녀의 시신을 담은 관은 납으로 특수처리를 해야했다. 마리가 남긴 귀중한 사료인 연구노트 역시 방사능 때문에 지금도 방호복을 철저히 입고나서야 열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마리가 과학 연구 및 노벨상과 더불어 세상에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훌륭한 '자식농사'였다. 퀴리 부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퀴리 가문은 노벨상 명문가로 명성을 이어갔다. 마리의 장녀 이렌 퀴리와 그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 부부는 인공 방사성 물질을 개발한 공로로 1935년 부부가 공동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둘째딸 이브 퀴리의 남편인 헨라 라브리스 주니어는 자선기구 유니세프의 대표로 196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퀴리 가문은 각분야별로 총 6번의 노벨상을 수상하는 업적을 이뤄냈다.
또한 둘째 이브는 부모나 언니 부부, 남편처럼 노벨상은 타지못했지만 어머니의 전기를 집필하여 마리 퀴리의 인생과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기여했으며, 역시 유니세프 활동을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상을 수상했다. 또한 마리의 손녀인 핵물리학자 엘렌 랑주뱅 주니어, 손자인 생물물리학자 피에르 졸리오 등, 퀴리 가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선대의 유산을 이어받아 과학 명문가로서의 명성을 계승해나가고 있다.
"삶에서 무서워할 것은 없다. 단지 이해할 것만 있다."
마리 퀴리가 남긴 격언이다. 마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강하던 시대를 살면서 온갖 고난속에서도 연구에 대한 열망을 꺾지 않았다. 그녀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여성을 둘러싼 유리천장을 깬 선구자로서도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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