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백의종군 정신은 위기극복의 귀감이다

노승석 2024. 1. 3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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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시련을 승리로 승화시켜

[노승석 기자]

▲ 난중일기에 나오는 감타기 마을 하마곡터 이순신이 백의종군중 강씨들의 조문의 예를 받은 감타기 마을 유적사진
ⓒ 여해연구소
현재 국내에는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나오는 유적지가 전적지를 포함하여 대략 4백여 곳이 된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李舜臣)이 작전 활동할 때에 머물렀던 바다와 연안에는 선로(船路), 해상기지, 포구(浦口), 만(灣), 곶(串), 섬, 선착장, 선창(船艙) 등이 있고, 내륙에는 산, 강, 나루터, 성곽, 관아, 누대, 사당, 봉수, 역참, 구릉, 가옥, 구릉, 절벽, 골짜기, 사정, 묘소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이 정유재란으로 최대의 수난을 겪은 백의종군(白衣從軍) 시기에 오고간 유적지는 7년의 임진왜란 기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을 보여준 곳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 하겠다. 1597년 3월 4일에 왕명거역죄로 투옥되었다가 27일만에 석방되어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이후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8월 3일까지의 백의종군 여정길은 국난극복이라는 대의 실현을 위한 인고(忍苦)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백의종군하면 이순신의 삭탈관직을 뜻하는 이야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항간에는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중국의 문헌에 없는 용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과연 그러할까. 본래 백의(白衣)란 평민신분의 뜻으로, 백의종군하면 관리가 죄를 지어 면직 처분을 받은 상태로 종군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한 출전을 고증해보니, 중국의 고전적류에 나오는 것이 확인되었다. 송나라 때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당기(唐紀)〉를 보면, "당나라 때 청주자사(青州刺史) 유인궤(劉仁軌)가 해운을 감독하다 배를 전복시키자, 백의종군으로 스스로 공을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미 천여 년 전부터 중국에서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백의종군로 구간을 살펴보면, 서울,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 각 지역마다 역사적인 특색이 있다. 예컨대, 서울 종로구 종각역 1번 출구 부근은 4월 1일 이순신이 의금부에서 출옥한 곳이고, 과천 인덕원과 오산의 독산성, 안성의 수탄, 팽성읍 객사 등은 이순신이 경유한 곳이다. 특히 4월 5일 아산에 도착한 이후 15일간의 여정은 이순신의 위대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기간이므로, 백의종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해가 뜰 때 길을 떠나 곧장 선산(先山)으로 갔다. 수목이 들의 불을 거듭 만나 말라 비틀어져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묘소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조카 뇌(蕾)의 집에 가서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했다.

- 정유년 4월 5일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노승석 역주)

이순신은 아산 음봉의 어라산에 있는 부친 이정(李貞)의 묘소에 참배하고 집안의 사당에도 들린 후 아산 음봉의 동천리에 소재하는 변존서의 집에서 모친의 부음을 듣고 게바위로 달려나가 모친의 시신을 맞이하였다. 어머니의 영연을 본가에 모신 후 하직을 고하고 신흥리 감타기 마을의 선전관 강희증 집 앞에서 강정(姜晶)과 강영수(姜永壽)를 만나 조문의 예를 표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곡을 하였다. 이곳이 바로 <난중일기>에 나오는 '하마곡(下馬哭)'의 장소이다. 여기서 남행 중에 상제의 예를 다하려는 이순신의 충정을 엿볼 수 있다.

그후 이순신은 익산 여산의 관노집에서 유숙하고 오원과 남원을 거쳐 순천에 도착하였다. 5월 20일 구례에서 이원익을 만나 소회를 듣고 하동에서 수군의 정보를 들었다. 6월 2일에는 삼가현의 관가에 유숙할 때 민가의 밥을 얻어 먹은 종들을 매질한 사건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결코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합천에 도착 후 멀리 적포들에 있는 권율 진영으로 가서 남행한 지 67일 만에 드디어 도원수 권율을 만나 작전업무를 도왔다. 그당시 권율은 원균의 무모한 작전을 감행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7월 18일 이순신은 칠천량의 패전소식을 듣고 19일 단성(현 산청)의 높은 동산산성에 올라가서, 전쟁에 유리한 지형을 살펴보았다. 그후 진주, 하동, 곤양, 노량, 남해를 거쳐 다시 진주 운곡(굴동)으로 갔다. 7월 27일 진주 수곡면 원계리 진배미에 있는 손경례(孫景禮)의 집에 6일간 머물면서 작전을 모의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8월 3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梁護)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의 복직 교서를 받고 54일 간의 백의종군을 마쳤다. 의금부에서 합천까지의 여정과 합천에서 복직되기까지의 여정 모두 120일간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에 겪은 일들은 범인이 감내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일들이었다. 그러한 악순환의 상황에도 이순신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국난극복의 한결같은 염원으로 전쟁을 준비하여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전공을 이루었다. 그 이면에 본바탕이 된 이순신의 백의종군정신은 고난과 시련을 승리로 승화시킨 교훈적인 사례로서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항상 위기극복의 귀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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