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외교관 시험 세 번 떨어지고 알게된 '무너진' 벽의 정체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살아가며 다양한 매듭을 시도하고 짓고, 끝맺는다. 기다리는 한 기회는 돌고 돌아 찾아오고 용기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언제든 싹을 틔울 수 있다. 낯선 기회를 기쁘게 껴안은 사람들이 내게 그런 메시지를 전한다.
해가 바뀌며 변화를 기쁘게 맞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목적하지 않은 일과 급작스런 위기, 실패를 기회로 변모시켰다.
유진(가명)님은 4년간 함께 해온 북클럽의 멤버다. 지난 추석 즈음 덜컥 카페 자리를 계약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런 계획을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성격에 여행을 즐기지 않고 집에서 독서로 보내는 시간을 커다란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었으니, 예상을 초월하고도 한참을 초월한 일이었다.
유진님은 긴 시간 아이들 돌보며 주부 역할에 충실했다. 그랬던 분이 지난여름 독서 수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도 신선했다. 새로운 시작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동안 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사적 모임이 아닌 수업료를 받는 공적 모임을 시도하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독서 수업을 시작한 경험이 유진님에게 또 다른 용기를 건넸을까. 유진님은 가까운 지인 셋과 우연히 뜻이 맞아 가게 자리를 보러 갔다고 한다. 하늘이 이끌었는지 마침 좋은 조건의 자리를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계약했다.
▲ 누군가의 첫 카페 유진님 닮은 단정하고 편안한 공간 |
ⓒ 김현진 |
지난 12월, 유진님이 새로 오픈한 카페를 찾았다. 골목을 돌자 카페 이름이 적힌 간판이 보였다.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심장이 뛰었다. 카페 문을 열자 앞치마를 맨 유진님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웠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인테리어와 메뉴 준비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었을까. 그러고도 처음이라 서툴러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하지만 유진님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한가한 틈 내 맞은편에 앉은 유진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래전 어떤 기회를 놓치고 많이 후회했다고. 그랬던 경험때문에 이번 기회는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당시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생각을 바꾸었다고 했다. 인생에 완벽한 때란 절대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준비되길 기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유진님은 커피도 베이킹도 아직 자신 없지만 열심히 배우겠다는 자신을 동료들이 믿어주어 든든하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지금, 얼떨떨하고 힘들지만 무척 즐겁다고 유진님은 말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일이 지닌 속성이 내게 맞는지, 그걸로 즐거운지가 중요하다는 걸 배우고 있다고.
유진님은 자신이 내어준 커피와 음식을 먹고 누군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몰랐다고 했다. '바리스타'나 '카페 주인'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일의 속성만은 자신과 잘 맞는다고, 좋아하는 성격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유진님다운 고요한 기대와 낙관이 좋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 그랬고. 자신에 대한 겸손한 믿음도 따스했다. 유진님 말고도 낯선 기회를 기쁘게 포용한 사람들이 있다.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난 가까운 친구와 몇 년간 준비하던 고시를 접고 사회 생활로 뛰어든 글쓰기 모임 멤버가 그렇다.
위기라는 가능성, 실패라는 도약
친구는 남편의 발령으로 두 달 만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의 큰 아들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미국과 한국 사이 학제가 달라 자칫하면 대입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단다. 한국 입시 제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한국에 남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집과 달라지는 환경도 문제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아는 이 없는 이국 땅,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바뀌는 커다란 위기다. 하지만 친구는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 부정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두려움에 우울해 하는 대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부지런히 아이들 학교를 알아보고 짐을 쌌다. 미국에 도착하는 바로 다음 날,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채로 학교에 면담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내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상상만으로 눈앞이 깜깜했다.
며칠 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집을 구하며 알게 된 한인 부동산 아주머니가 동반해 줘 학교 면담을 무사히 마쳤다고. 아이는 한국에 돌아가도 대입에 차질 없도록 원하던 학년에 배정받았다고. 하루 연습해 렌터카를 몰고 있고 아직 짐이 오지 않은 텅 빈 집에서 생활하지만 가장 큰 문제(학교)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다 괜찮다고 했다. 친구의 용기와 희망에 나까지 기운이 났다.
글쓰기 모임의 멤버인 단풍님은 외교관 후보자 선발 시험(구 외무고시)을 준비했었다. 세 번 거듭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마지막 도전에서는 평균 0.43점 차로 떨어졌다. 아까워 "한 번 더 도전해 보면 어떨까요?",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웃으며 지금까지 한 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밝고 쾌활한 성격에 똑 부러지는 사람이라 현명하게 결정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가 써온 글로 근 한 달 충격과 슬픔으로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시험을 접기로 한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도.
우연한 기회로 '시험 이후의 세계'라는 유튜브 채널과 인터뷰를 가졌다며 단풍님이 동영상 하나를 공유해 주었다. 인터뷰어도 도전을 접은 이유를 물었다. 최선을 다 해 본 사람은 그만둘 때를 스스로 안다고 단풍님은 답했다. 온 노력을 쏟아 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실패는 끝이 아니라 도약이라는 걸 배웠다고 덧붙였다.
시험에 몰두하느라 삶의 다양한 가능성이 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시험을 접으며 그 벽이 무너졌다는 걸 알았다고. 이제 자신을 더 사랑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시험 합격과 공무원이라는 안정적 루트를 접고 생소한 길로 발을 내딛는 그녀가 멋졌다.
▲ 낯선 길 익숙한 자신을 내려 두고 낯선 길 앞에 선 이들 덕분에 가능성과 희망을 배운다 |
ⓒ 김현진 |
변화와 위기, 시련을 기회로 바꾸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익숙한 자신을 내려 두고 미지로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 덕분에 삶이 숨겨 놓은 가능성을 엿본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눈부신 안부>, 문학동네) 소설가 백수린의 말처럼 가능성을 품은 사람은 희망을 본다. 희망은 우연한 기회를 기적으로 바꾼다.
유진님과 친구, 단풍님처럼 가능성을 알아보고 희망을 믿는 사람들의 존재가 내겐 이미 기적이다. 그들이 찾아낸 기회가 삶이 건네는 선물 같다. 희망을 보는 사람에겐 언제든 기적이 다가온다. 힘들 테지만, 힘들기 때문에 순간의 눈부신 빛을 만날 것이다. 기쁨이란 슬픔과 고통, 아픔 곁에서 자란다는 걸 우리는 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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