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랑]‘백세시대’라는 환상
수년 전 진료 현장에서 겪은 일입니다. 진료실로 찾아온 70대 남자 분은 “암에 안 걸리고 90살 넘겨 살 수 있도록,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정밀 검사를 다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몸에 암이 생기지 않는 곳은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 세 군데뿐이라고 설명해 드리니 몹시 아쉬워하셨습니다.
건강 검진을 열심히 받는다고 해서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100세 시대’라는 말들을 쉽게 해서 그런지, 누구나 웬만하면 80~90세까지는 살 것이고 100세까지 사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100세까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경우는 실제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녀나 가족들의 보살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는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타계한 지인 한 분이 떠오릅니다. 평소 몸에 좋지 않다는 술도 멀리하고, 등산과 골프로 다져진 근육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습니다. 65세로 정년퇴임할 때만 해도 주위에서는 90세까지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2년 후 건강검진 때 관상동맥이 좁아지는 협착이 발견됐습니다. 심장질환 전문가들은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본인이 강력히 원해서 좁아진 심장혈관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을 받았습니다. 시술 후에는 스텐트가 막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피가 굳지 않게 하는 아스피린 등의 약물을 지속적으로 복용했지요.
그런데 몇 개월 후 주차장에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신경외과에서 두개골을 열고 응급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혈액응고를 억제하기 위해 복용하고 있던 약물로 인해 머릿속 출혈이 워낙 심해 손조차 대지 못했고, 중환자실에서 몇 주를 보낸 뒤 사망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삶의 유한함과 더불어 죽음의 예측불허성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지금은 건강하더라도 언제 갑자기 죽음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줍니다.
잘 알려진 보왕삼매론의 첫 구절은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입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찌 보면 이런 바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대로 살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삶의 유한함을 알고 죽음을 담담하게 대하는 분도 있습니다. 2009년 9월 1일 한 신문에는, ‘신종플루’가 한창 유행할 즈음 ‘때가 되면 결국은 죽는 것을’이라는 제목의 김형태 변호사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처가 여름 뒤끝에 며칠 몸살을 앓았다. 처음에는 기침이 나고 목이 붓더니 열도 났다. 병원에 간다는 걸 겁을 주어 말렸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인지 확인하는 데만 15만 원이 든단다….(중략) 내 처가 비교적 가벼운 질병의 공포 때문에 들어가는 15만원의 검사비를 당장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에게 돌리고, 내가 적당히 늙으면 독감에 걸려 죽어 주는 게 가장 멀리 있는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도리이다.”
영원히 살겠다고 하루 100~250개의 알약을 복용하며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외국의 한 미래학자와 참으로 대조됩니다.
‘술은 익어가고 도는 깊어지고’에 소개된 장자의 지락편도 소개합니다. 여행길에 오른 장자가 쉬기 위해 잠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해골 위였습니다. 꿈에서 장자는 해골과 대화를 나눕니다.
장자: 생명의 신에게 부탁해서 당신의 형체를 회복시켜 살과 근육이 다시 자라나게 하고 부모와 아내,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면 어떻게 하겠소이까?
해골: 싫소이다! 내가 왜 임금보다 더한 즐거움을 포기하고 인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겠소?
그가 있는 곳에는 모셔야 할 왕도 없고 신하도 없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서, 왕이 누리는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어떻게 해서든 생존의 길이를 연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죽은 후에 가는 세계가 사실은 그렇게 회피하고 혐오할 만한 세계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 작가였던 스캇 펙은 자신의 강연을 들은 청중이 “우리에게 무언가 인생의 은총 같은 게 있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모두 죽게 된다는 점이죠. 인생을 끝낼 준비를 할 만큼 세상살이에 지친 건 아니지만 이런 쓰레기 같은 세상을 300~400년 더 헤치고 살아야 한다면 아마 내가 가진 모든 돈을 털어서라도 일찌감치 죽는 쪽에 투자할 겁니다.”
죽고 나서도 냉동질소 탱크에 보관돼 미래에 해동돼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생사관을 보여줍니다.
1986년 55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타계하기 얼마 전 병문안을 왔던 후배에게 “나 50년 살았지? 하지만 일과 여행, 놀이를 다른 이들의 세 배는 한 것 같으니 150세까지 산 셈이지”라고 말하며 담담하게 생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삶의 길이에만 집착하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오로지 오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늘 질병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쫓기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을 배려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삶의 깊이나 풍성함은 수명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김수근 건축가와 같이 10년을 30년처럼, 50년을 150년처럼 밀도 있게 살아간다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배려와 즐거움과 의미 역시 그만큼의 밀도로 진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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