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지킨 어부 안용복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독도. |
ⓒ 경상북도 제공. |
안용복(安龍福, 출생연대 미상)은 조선 숙종 때 동래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우리 땅 독도를 넘보고 틈만 나면 집어삼키려 든다. 안용복은 일개 어부 출신으로 두 차례나 일본을 방문하고 담판 끝에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 받았다. 1696년(숙종 22) 조정은 그가 일본을 다녀왔다고 하여 심문하였다.
안용복은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인근에서는 효자요, 재동으로 알려졌다. 바닷가 포구에서 성장한 관계로 자연 일본인과의 접촉이 잦은 지역이라 은연중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이웃 마을에 사는 유유(柳柳)라는 처녀가 소꿉동무였는데 이 처녀는 생활이 곤궁하였다. 그래서 처녀의 외삼촌이 거주하는 다대포로 이사를 갔는데 여기서 처녀의 어머니가 병환이 심해 어쩔 수 없이 대마도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안용복은 처녀를 구출하려는 일념으로 일본어에 힘썼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에게 유유 아가씨를 구하러 떠나겠다고 말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상심하여 자리에 눕게 되자 어머니는 울산에 있는 이모댁을 다녀오도록 안용복을 달랬다.
안용복은 울산을 향해 가던 중 산적을 만났는데 그 일당이 왜구들이었다. 이들을 추격, 소굴을 불사르고 괴수를 닦달하니 이들의 본거지가 대마도인 것을 알게 되었고, 유유도 그곳에 잡혀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안용복이 산적들을 볼모로 유유와 교환 조건을 제시하자 왜적은 이에 응해 왔다. 이러하여 유유 처녀는 무사히 돌아왔고, 볼모로 잡아두었던 왜구들은 다시는 노략질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각각 대마도로 돌려보냈다.
그 뒤, 안용복은 유유 처녀와 결혼하여 새살림을 차렸으나, 남해에서 발호하는 왜구가 기승을 더해가자 신혼살림의 즐거움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나 해안 경비의 대임을 맡고 바다로 나섰다.(한찬석, <독도비사>, 여기서는 김우규 엮음, <동해의 파수꾼 독도>, 재인용)
안용복은 1696년 봄 16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건너갔다. 일본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의 경지인데 왜인이 어찌 월경하여 침범하는가. 너희들은 모두 묶어 마땅하다."고 꾸짖었다. 그러자 왜인들은 "우리는 본래 우산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본소(本所)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안용복은 "이미 우산도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들이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고 했다.(<숙종실록>, 권 30)
안용복의 호통에 왜인들은 모두 달아났고, 그와 동료들은 왜인들을 쫓아 일본 옥지도(玉岐島)를 갔다. 그곳 도주에게 "내가 수년 전 이곳에 와 울릉·우산 등의 섬은 조선지계(朝鮮之界)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갔는데, 또 우리의 경지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따졌다.
결국 도주의 상관인 태수와 담판 끝에 "두 섬(울릉도와 독도)은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무겁게 처벌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앞과 같음)
▲ 안용복 기념관에 전시된 일본 문서(위쪽)와 안용복이 지참했던 '조선8도지도' 모습. 2005년 5월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의 무라카와 가문에서 공개한 '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에는 1696년 안용복이 일본 태수에게 항의하러 가다 오키섬애 도착했을 때 일본관리들이 안용복을 조사 심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조선8도지도를 꺼내 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죽도) 독도(송도)가 속해있다고 설명했다. |
ⓒ 오문수 |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둔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강점하여 죽도(竹島)라 칭하고 멋대로 도근현(島根縣)에 편입시켰다. 이에 앞서 1월 28일 내각회의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시킨다는 내용을 비밀리에 결정하였다. 일본정부가 이토록 서두른 것은 러일전쟁 수행의 전략상 필요와 영토적 야욕에서다.
일본정부는 자기들의 <관보>에도 각의결정을 게재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의 저항은 물론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신문에서도 일절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이유에서다. '영토편입'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관보>에도 싣지 못할만큼 불법무도함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국제법상 원천무효에 속한다.
제2차대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약칭 GHQ)는 1949년 1월 29일 사령부령 제677호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항을 집행하기 위하여 "일본의 영토와 주권행사 범위"를 정의했다. 이 문서의 제3조에서 제외되는 것은 ①울릉도 ②독도(죽도) ③제주도라고 명시했다. 이처럼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리고 연합군최고사령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인 것이다.
일본은 해마다 7월에 발표한〈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취지의 내용을 담았다. 2005년 이후 억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당한 독도 방위훈련을 맹비난한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치밀하게 계산된 책략에서 나타난 증상이다. 그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배경을 분석한다.
첫째, 2000년 전부터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경영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연장선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이같은 역사왜곡을 바탕삼아 조선을 식민지로 침탈하고 아직도 그런 망상과 집착을 버리지 않고 있다.
둘째, 독도의 전략적 가치다.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독도에 망루와 한국 – 독도 – 일본을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을 설치하여 러시아함대를 격파하는 데 크게 활용했다.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직전에 시마네현의 고시를 통해 불법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시킨 다음 본격적으로 한국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독도침탈에서 한국의 대응수준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넷째, 일본이 독도를 점거하여 첨단군사시설을 갖추게 되면 남북한, 중국, 러시아, 미국 해군의 동향을 일거에 카버할 수 있다. 따라서 동북아 해양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장기적, 군사적 목적을 갖고 있다.
다섯째, 일본은 지난 50여 년 동안 독도 인근 해저의 광물자원 특히 하이드레이트(얼음처럼 고체화된 천연가스)를 탐사하여 엄청난 매장량을 확인했다. 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다.
여섯째, 독도 연안은 온 · 난류가 섞이는 곳이라 어족자원이 풍족하다. 일본연안의 고갈된 어장을 독도 연안으로 확대하려는 속셈이다.
일곱째, 일본은 현재 러시아와 북방4도, 중국과 센카쿠열도, 대만·베트남 등과 남사군도 등의 영토분쟁을 하고 있다. 선제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화 함으로써 이들 분쟁지역의 해결에 우월권을 갖고자 의도한다.
여덟째, 독도문제를 영토분쟁지역으로 비화시켜서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는 전략이다. 국제사법재판소에는 일본인 재판관 한 사람이 있어서 유리한 측면이 있다.
아홉째, 일본 극우보수세력의 잠재적인 영토팽창정책을 부채질하고 군사대국화를 강화하려는 정치문제가 작용한다. 역대 총리는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의도에서 그때마다 독도문제를 이슈화해 왔다.
열째, 일본은 1877년(메이지10년)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의 지령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 공시하였다.(일본총리훈령) 또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을 비준할 때 일본정부는 일본 의회에 제출한 지도에 독도는 한국 땅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곧 일본정부가 독도는 한국 땅으로 인정한 것이다. 사안이 이러함에도 주기적으로 독도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독도침탈 의도는 길게는 임진왜란 때부터, 짧게는 메이지유신 이래 추구해온 한반도 식민지 구도의 유산이고 악습이다. 일본은 결코 이를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안용복의 호국정신이 기려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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