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범죄자들의 소도(蘇塗)가 아니다 [이기선 칼럼]
총선 전 1심 유죄판결에도 출마 가능 ‘방탄’ 논란 제기
다수의석만 확보하면 된다는 정략에 기인
공천받아 당선되면 지위 이용해 수사나 재판 지연 뻔해
임혁백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이 지난 21일 열린 간담회에서 성범죄, 음주운전, 직장 갑질, 학교 폭력, 증오 발언을 ‘5대 혐오범죄’로 규정하고, 공천심사 때 이와 관련된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21대 총선에 적용했던 기준보다 강화된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 ‘5대 혐오범죄’가 이재명 대표에게는 적용되지 않도록 설계됐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대표가 “재판을 계속 받고 있고, 수사 받고 있는 데다 전과도 여러 개” 있는데 “희한하게도 그 ‘5대 기준’에 하나도 걸리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었던데, 정확하게 이 대표만 거기 걸리지 않도록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만든 것 같다”라고도 했다. 이런 의혹과 논란이 제기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5월 이번 22대 총선에 적용할 ‘후보자선출 규정’을 개정했을 때도 그랬다. 21대 총선 때는 ‘공천 부적격자 기준’에 ‘뇌물, 성범죄 등 형사범 중 하급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현재 재판을 계속 받는 자’로 명시돼 있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삭제하고 ‘중대한 비리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만 규정했다. 이를 두고 배임과 뇌물, 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이 대표가 총선 전에 1심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출마할 수 있도록 대비해 놓은 것이라는 ‘이재명 방탄’ 논란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1심에서 유죄를 받은 자는 물론 부적격 사유에 따라 징계를 받은 자도 심사 대상이 되도록 더욱 강화”한 것이라고 해명했었다. 하지만 앞서 임 공관위원장은 비리 혐의 등으로 재판받고 있어도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받기 전까진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라며 당시 민주당의 해명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보편적 원칙이다. 따라서 정치인에게도 적용돼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후보자 공천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대부분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또한 하급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상급심에서도 유죄판결 받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원내 제1당인 민주당이 하급심에서 유죄 선고받은 자를 공천해 주는 것은 범죄자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는 꼴이다.
역대 국회에서 의원 재직 중에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는 제법 있었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한 하급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상급심 재판 중인 사람을 공천한 경우는 없었다.
이건 개혁이 아니라 퇴보다. 선거제 개편과 관련해서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라고 했던 이 대표의 말과 연계해 보면, 범죄자라도 경쟁력이 있으면 공천해서 다수의석만 확보하면 된다는 정략에 기인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의 경우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는 사람이 이 대표를 포함해 4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직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고 하니 너도나도 당당하게 공천을 신청할 것이다. 그리고 공천받아 당선되면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수사나 재판을 지연시키려 할 것이 뻔하다.
2018년에 실시된 울산시장 선거와 관련해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으로 수사받던 황운하 대전경찰청장이 현직 신분으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됐고, 의혹이 제기된 지 5년, 기소된 지 무려 3년 10개월 만에 1심이 선고된 사례를 미루어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그렇게 되면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범죄자들의 소도(蘇塗)’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치혐오와 국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이번 선거의 승패는 어느 정당이 더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 각 정당에서는 국민이 혹할 공약과 정책을 개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현 여부도 알 수 없는 그런 사탕발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천혁신이다. 후보를 공천하는 데 전문성과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성 검증에도 더욱 철저히 해주기를 바란다.
글/ 이기선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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