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마트, 길 안 잃게 거대 안내판…계산 눈치 안보게 전용창구 [치매와의 공존]
언뜻 보기엔 여느 마트와 다를 바 없다. 자세히 보면 화장실이나 계산대 방향을 알리는 안내판의 크기가 유난히 크고, 바닥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지난 15일 방문한 일본 대형마트 ‘이토요카도’ 하치오지(八王子)점. 치매에 걸린 손님을 배려한 서비스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곳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치매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일본에선 쇼핑 센터나 공항 풍경도 바뀌고 있다. 경증 치매 환자들이 혼자 찾아와 쇼핑을 하고 여행 등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인지 기능이 저하된 사람들이 쉽게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옷, 안심하고 쇼핑할 수 있도록 돕는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이 개발되는 등 ‘치매’는 기업의 새로운 시장으로 떠올랐다.
이토요카도 하치오지점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계단(階段)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치매를 앓는 분들은 엘리베이터가 복잡하게 느껴지고 에스컬레이터는 속도가 빨라 이용을 어려워하시더라구요. 그 분들을 위해 계단 알림판을 붙이고 그동안 닫아두었던 계단 입구 문도 활짝 열었습니다.” 오기노 겐타로(荻能憲太郎) 관리총괄 매니저의 설명이다.
치매 환자들의 요구 담아 매장 정비
고령자들이 많이 사는 주택 단지 한 가운데 자리한 이 마트에선 수년 전부터 계산이 끝나지 않은 카트를 그대로 끌고 나가거나, 상점 한가운데서 과일 등을 먹어 치우는 손님이 종종 발견됐다. ‘좀도둑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초기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이었다. 2020년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하치오지시가 운영하는 인근 고령자안심상황센터와 연락을 취하게 됐다. 치매에 걸린 주민들도 마트의 고객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매장을 정비했다.
일본 치매 유병율로 계산해 하루 마트를 찾는 치매 환자를 약 300명 정도로 상정했다. 핵심은 이들이 매장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 계산을 원활히 마치도록 돕는 것 두 가지였다. 아래를 보고 걷는 치매 환자들의 특징을 고려해 바닥에도 큰 스티커를 붙이고, 방향을 잃었을 경우 직원을 부를 수 있는 벨도 설치했다. 특히 고령자나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는 ‘배려 계산대’가 반응이 좋다. 오기노 매니저는 “인지 장애가 있는 분들은 계산대에 동전을 주르륵 꺼내 놓는 경우가 있는데, 계산이 길어져도 뒷손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좋아하는 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변화는 번지고 있다. 이토요카도의 다른 지점도 매장 직원들에게 치매 손님에 대한 대응법을 알리는 ‘치매서포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2023년까지 전체 직원의 절반 정도가 수강을 마쳤고, 올해는 매장 직원 전원이 서포터 자격을 갖추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테(岩手)현의 슈퍼 ‘마이야 다키자와점’도 매주 한번씩 인근 치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슬로우 쇼핑 데이’를 열고 있다. 평소 자유롭게 쇼핑을 하기 힘든 인근 치매 환자들이 일정 시간대에 모여 서포터 등의 안내를 받으며 쇼핑을 하는 방식이다.
하네다 공항의 경우 2022년부터 치매 환자들의 여행을 돕는 ‘해바라기 지원 스트랩’을 운영 중이다. 인지 장애로 공항 이용이 어려운 사람들이 터미널 안내 카운터에서 해바라기가 그려진 카드를 받아 목에 걸고 있으면 이를 발견한 공항 직원들이 신속하게 여행 과정을 지원하는 서비스다. 공항은 흥분한 치매 환자들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는 휴식 공간도 마련하고 있다.
정부가 제품 개발도 지원
치매 환자들을 위한 상품과 서비스 시장은 앞으로 더욱 커질 전망이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에선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있고, 고령자가 증가하면 치매 환자도 늘기 때문에 당연히 시장이 성장할 것”이라며 “치매와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일본 경제산업성은 치매 환자들과 제품 개발을 원하는 기업을 연결해주고, 제품 개발 과정 전반을 지원하는 ‘오렌지 이노베이션 프로젝트’를 2019년부터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쇼핑 애플리케이션 ‘카에루(KAERU)’는 선불카드와 스마트폰 앱을 결합한 서비스다. 가족들이 사전에 휴대폰 앱을 통해 하루 사용 한도 등을 설정해 치매를 앓는 부모의 과도한 쇼핑을 막고, 분실 신고도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치매 환자들이 쉽게 신거나 벗을 수 있도록 앞코, 뒷코를 없애고 입구가 부드럽게 벌어지도록 만든 양말, 소화 기능이 저하된 치매 환자들을 배려한 유동식 도시락 등이 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 중이다. 대형 생활용품 회사 라이온도 치매 환자들에게 휴대폰으로 양치질 시간과 방법 등을 알려주는 구강 케어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경산성은 앞으로 일본 내 치매 환자들을 위한 제품·서비스 시장의 규모가 총 1313억엔(약 1조 19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치매 환자들의 안전한 외출을 돕는 '이동서비스'에 약 922억엔(약 8343억원), 안심 쇼핑을 돕는 결제 서비스 등에 323억엔(약 2922억원), 취미와 학습을 위한 서비스에 약 68억엔(약 615억원) 등이다.
도쿄=이영희·김현예 특파원, 서유진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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