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일하실 분, 치매 있어도 괜찮아요" 日 치매와 공존 실험
“식기 전에 맛있게 드세요.”
지난 15일 일본 아이치(愛知)현 오카자키(岡崎)시. 역에서 도보로 15분 남짓 떨어진 주택가에 자리 잡은 ‘지바루 식당’을 찾았다. 앞치마를 두른 백발의 이노우에(井上·83) 할머니가 느릿한 속도로 오키나와식 국수를 들고 온다. 평범한 음식점 같지만 지역 주민 사이엔 이색 식당으로 입소문이 났다. 종종 주문한 것과 전혀 다른 음식이 나오는 ‘주문 틀리는 식당’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삼삼오오 방문한 젊은 남녀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더러 ‘주문을 틀리는’ 이노우에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
올해로 3년째 이곳에서 일하는 이노우에 할머니는 수요일을 빼고 오전 11시에 출근해 오후 3시 영업을 마치면 퇴근한다. 시급은 1030엔(약 9300원)이다. 음식점에서 40년을 일했다는 그는 치매에 걸린 후 집에서 TV만 보다 지인의 소개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는다. “정말 좋아요. 돈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손님들과 대화 나누는 것이 즐거워서 일합니다.”
기본법, ‘치매와의 공생(共生)’ 선언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2023년 기준 고령화율 29%)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최근엔 지바루 식당처럼 경증 치매를 앓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고용하는 식당·카페 등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 내 치매 환자의 수는 2020년 600만명을 넘어섰고 내년(2025년)에는 675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자 5명 중 1명이 치매 환자인 상황을 앞에 두고 ‘치매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해 올해 1월부터 시행 중인 ‘공생(共生)사회 실현을 위한 인지증(치매의 일본 명칭) 기본법’은 이런 방향 전환의 신호탄이다. 일본은 20년 전부터 치매(癡呆·일본어로 ‘지호’)라고 불리던 병명을 ‘인지증’으로 바꾸고, 일명 ‘오렌지 플랜’(치매대책 추진 5년 계획)을 마련해 치매 예방 및 지원 체계를 정비해왔다.
공생이 화두가 된 것은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며 더 이상 환자 본인과 가족만으로 치매 문제를 감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치매와 관련한 사회적 비용이 연간 약 20조엔(약 18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면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지역 사회가 힘을 합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게다가 치매 환자의 절반 이상은 격리나 적극적인 돌봄이 없이도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경증’으로 분류된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혼자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숙제로 떠올랐다.
일본 국립장수의료연구센터 신도 유미(進藤由美) 연구원은 “일본의 치매 정책은 예방 차원에서 공존을 도모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치매에 걸린 이들도 인권과 존엄을 유지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일하는 치매 환자, 사회적 이해 높여
치매 환자를 고용하는 것은 아직 일본에서도 ‘뜻 있는 사람들’의 시도로 추진되는 시작 단계다. 지바루 식당의 이치카와 다카아키(市川貴章) 사장도 17년 간 개호복지사(요양복지사) 일을 하면서 ‘치매 환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집중해 일하는 것이 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 경우다.
올해로 식당 운영 5년째, 처음엔 낯설어했던 손님들의 반응도 바뀌었다. 주문이 틀려도 이해해주고 치매 어르신에게 ‘요리를 추천해달라’고 말을 걸기도 한다. 식당 한 켠에는 주민들이 기증한 옷이나 아이 장난감 등이 놓여 필요한 사람이라면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이치카와 사장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치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치매에 걸려도 계속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도쿄(東京) 조후(調布)시 센가와(仙川)엔 한 달에 한 번 문을 여는 ‘주문 틀리는 카페’가 성업 중이다. 지난 10일 카페를 찾아가니 가게 안은 손님으로 가득하고 문 앞에 3명의 여성이 줄 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2시간 거리의 요코하마(横浜)에서 찾아왔다는 곤노 히로미(今野裕美)는 “치매를 가진 분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서 공부 삼아 왔다”고 했다.
시즈오카(静岡)현 후지노미야(富士宮)시에는 ‘언제든 꿈을’이라는 이름의 목공소도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이곳 전체 직원 14명 중 10명이 치매 환자다. 도쿄 외곽 마치다(町田)시의 보호 시설 ‘데이즈 BLG’는 일하고 싶은 치매 환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반년간 일자리 연수를 한 뒤 세차나 옷감 재단, 채소 배달 같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데, 최근 전국 8개소로 사업을 확대했다.
한국 ‘100만 치매 시대’, 준비 서둘러야
일본의 이런 움직임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치매 인구는 약 96만명으로 올해 중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도 2008년부터 제1~3차 국가치매관리종합계획을 수립하고 2012년에는 치매관리법 제정, 2017년에는 ‘치매 국가책임제’를 선포하며 지원 체계를 확충했다. 그러나 치매 환자를 치료, 간호의 대상으로 접근할 뿐 아직 사회 안으로 적극 받아들이는 방안 등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방법은 치매 안심센터를 통해 치매 검진에 참여하고, 치매에 걸렸다면 진행을 늦추는 약을 먹거나 인지 훈련을 받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그러면서 “이후 치매가 계속 진행되면 주간 보호시설이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수순”이라며 “과연 치매 환자에게 시설 생활이 최선이겠느냐”고 반문했다.
박건우 치매학회 명예회장(고대안암병원 신경과 교수)은 “제일 중요한 건 지역 사회 내에서 치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라며 “치매에 걸렸어도 음식을 서빙하거나 주문이 틀려도 뭐라고 안 하는 치매 카페를 운영하는 것 등 (일본식 모델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쿄=이영희·김현예 특파원, 서유진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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