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게는 물건 팔고 돈 안받는다…120명 사는 佛 '치매 마을' [치매와의 공존]

서유진 2024. 1. 3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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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문을 연 프랑스 남서부의 랑데 알츠하이머 마을은 주민 모두가 치매환자다. 주민 120명이 의료 전문가 및 자원봉사자 240명과 어울려 사는 곳이다. 마을 상점에선 식료품을 ‘판매’하지만, 환자에게 현금을 받진 않는다. 그래서 지갑을 깜박 잊고 와도 물건을 받아갈 수 있다. 일상을 살며 그저 느긋하게, 자기 리듬대로 보내면 된다.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마을 안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고 돌보기 때문에 시설 안에 산다는 느낌이 적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주민이 내는 거주비(월 평균 2000유로·약 288만원)는 일반 요양원과 비슷한 수준이고, 기타 운영비는 지방 정부가 낸다. 프랑스 지방 정부가 이 마을을 짓는데 1700만 파운드(약 281억원)를 지원했다.

네덜란드 치매 환자 커뮤니티인 호그벡 마을 주민들의 모습. 호그벡 공식 홈페이지 캡처

이 마을에 대해 최문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중앙일보에 "격리와 통제 중심이 아닌 개인의 자기결정과 자유에 가치를 둔 곳"이라며 "치매환자가 사회와 단절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실제 랑데 알츠하이머의 장점으론 환자·가족 모두 ‘의료시설 같지 않은 환경’에서 거주해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점이 꼽힌다. 엘렌 아미바 보르도대학 교수는 BBC에 “치매 환자가 의료 시설에 들어가면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인지 기능 저하가 빨라지는데, 여기는 그런 현상이 없다”고 전했다.

2020년 문을 연 프랑스 남서부의 '랑데 알츠하이머' 마을은 치매환자들이 사는 마을이다. 랑데 알츠하이머 공식 홈페이지 캡처


가족들도 부모를 시설에 보냈다는 죄책감·불안감이 줄었다. 정해진 면회 시간이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가족들도 숨통이 트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가족들의 의욕과 건강도 치매 환자의 건강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박건우 대한치매학회 명예회장(고려안암병원 신경과교수)은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어야 하고 가족들이 답답할 때 누군가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며 "환자 가족(의 신체·정신 건강)도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에 설립된 치매마을에서 2020년 9월 치매환자들이 공을 활용한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AFP=연합뉴스

호주·미국 등 치매 마을·커뮤니티 12곳

BBC에 따르면 세계 각지에는 랑데 알츠하이머와 유사한 치매 마을·커뮤니티가 약 12곳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9년 시작된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이다. 정부자금을 지원받는 이 곳은 지난해 기준 주택 27곳에 주민 188명이 산다. 중증 환자도 많다. 식당·극장·맥주 펍·문화센터·마트·카페·미용실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약 250명의 간호사·간병인·노인질환 전문의가 상주하며 환자를 돕는다.

호그벡 주민도 랑데 알츠하이머처럼 상점에서 음식·샴푸 등을 살 수 있지만 실제 돈은 오가지 않는다. 계산원은 치매 환자에 맞춤형 응대를 하는 훈련을 받는다. 쇼핑을 하게 만드는 건 환자가 일상 감각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호그벡 입소 비용은 1인당 월 5000유로(약 720만원)이지만 정부의 노인장기연금보험으로 비용 대부분을 해결한다.

물론 치매 마을엔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박 교수는 "호그벡 마을의 경우 예산상 문제로 값비싼 치료제를 제외하고, 높은 임금을 줘야하는 물리치료사 수를 줄였기에 운영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호주·미국 등도 유사한 치매 마을·커뮤니티를 운영중이거나 운영 예정이다. 국내에선 서울요양원이 '호그벡 모델'을 바탕으로 개원했다.

네덜란드 치매 환자 커뮤니티인 호그벡 마을 주민들의 모습. 호그벡 공식 홈페이지

2030년 전세계 7800만 명 치매…韓 올해 100만명 돌파

세계 각국에 치매 마을이 느는 데 대해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치매 환자가 침대에 누워서만 사는 게 아니라 일상 생활을 하고 타인과 교류를 해야 증상이 개선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평균 수명의 증가에 따라 치매 환자는 매년 증가 추세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 환자는 2009년 3500만명에서 지난해 5500만명, 2030년 7800만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정순둘 국민통합위원회 '노년의 역할이 살아있는 사회'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출범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한국은 정부가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선언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내에서 일부 치매 안심마을은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중증 치매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없고, 건강한 주민에게 치매예방교육을 하는 수준이란 지적도 나온다. 또한 센터 상당수가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순둘 교수는 "치매 마을 조성에 앞서 치매에 대한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서울 용산구 측이 호그벡과 유사한 '치매자유 마을'을 경기도 양주에 건립하기로 하자, 양주시 주민들이 이를 기피시설로 인식해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경기북부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 간 기피시설을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양주시 등에 따르면 서울시 용산구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에 '치매안심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양주시는 기산호수가 양주의 대표적 관광지이며 지역 내 요양시설이 포화 상태라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사진은 기산호수 근처에 걸린 치매안심마을 조성사업 반대 플래카드의 모습. 연합뉴스


박 명예회장은 "여러 질병을 동시에 앓는 어르신을 치매라는 이유로 의료진들이 기피해서 병원 치료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정부가 올해 7월 시범 도입 예정인 '치매 안심 주치의 제도'가 정착되면, 치매 국가책임제에 한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치매 안심 주치의 제도는 전문의 등이 치매 환자의 건강 전반을 관리하는 제도다.

박건우 대한치매학회 명예회장. 중앙포토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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