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精談] 아저씨 소리를 듣더라도
어릴 때 꿈꾼 어른의 모습이 있다. 오픈카를 타고, 고급 요리를 즐기고, 친구와 바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년. 반면, 기피한 버전도 있다. 중년이 되어서도 학생처럼 단어장을 끼고, 걸핏하면 역사를 화제 삼는 아저씨.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린 덕에 스포츠카 비슷한 차를 타고 아늑한 바에서 친구와 위스키를 곁들이며 감세 노하우를 공유하는 어른이 겨우 되었다, 라면 좋겠지만, 정확히 후자의 어른이 돼버렸다.
꿈 많고 희망 가득한 소년이 무럭무럭 자라 ‘역사 덕후’가 된 것이다. 어째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소설가이기에, 이야기를 이해하고 꾸며내는 게 일이다. 그래서 서사가 훌륭하다는 책들을 오래도록 뒤적였다. 그러다 결국은 역사가 이야기의 보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외울 필요가 없는 역사, 즉, 즐김의 대상인 역사는 그 어떤 서사보다 개연성이 탄탄한 이야기였다. 그 끝이 없어, 대하소설로도 채울 수 없는 이야기의 갈증을 풀어줬다. 게다가 ‘슈테판 츠바이크’나 ‘막스 갈로’처럼 훌륭한 소설가들은 역사가이기도 했다. 고 최인호 작가 역시 ‘모든 소설은 역사소설’이라며, 소설가가 역사에 빠지는 것은 운명과 같다는 식의 말을 남겼다. 환언하자면, 이야기라는 열차에 올라탄 승객이 도달할 종착역은 역사(歷史)인 것이다.
한편, 물리학자에게는 이 세계가 원자로 구성돼 있겠지만, 소설가에겐 호기심 유발체로 구성돼 있다. 당연히 호기심이 쉬이 풀리지 않는 것도 있다. 이런 경우 역사적으로 접근하면 해결되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의 핵 과학자 회보는 매년 ‘지구 종말 시간’을 발표한다. 이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면 지구는 망한다. 2024년 인류가 멸망까지 앞둔 시간은 90초. 당장 벙커로 피해야 할 것 같다. 한데 지구 종말이 자정이니,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시곗바늘이 움직인 첫 순간은 지구가 탄생한 때다. 지구는 약 45억6700만년 전에 태어났다. 하루는 1440분이니, 이를 나누면 이 시계의 1분은 317만년이 넘는다. 지구 종말까지 475만년 넘게 남은 셈이다. 과학자들은 왜 이리 충격적인 화법을 구사했을까. 이 시계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가 주축이 되어 1947년에 발표됐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2년 후다. 그렇다. 원자폭탄 발명에 기여한 두 과학자가 큰 충격에 빠져 인류에게 자극적인 방식으로라도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도 역사적 맥락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한, 주장이 넘쳐나는 세계 속에서, 개인으로서 의견 형성도 할 수 있다.
음악가에게 이 세상은 소리로 가득하겠지만 소설가에는 언어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언어는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다. 한데, 이 열쇠는 종종 수긍하기 어렵다. 예컨대 bookmaker는 ‘도박업자’다. 딱 보기에도 bookmaker는 책을 만드는 사람인데, 어째서 도박업자란 말인가. 물론 원래 뜻은 ‘제본업자’였다. 한데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의 bookmaker들은 제본을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책을 경마장에 들고 가 내기꾼들이 건 돈을 받고 그 책에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bookmaker는 마권 업자가 된 것이다. 이 또한 역사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사랑하고, 호기심을 풀고 싶고, 언어를 이해하고픈 자가 어찌 역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사를 좋아한다고 하면 종종 고리타분한 아저씨 취급을 당하는 걸 안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좀 더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내가 처한 오늘의 현실을 최대한 오류 없이 해석하려는 의지의 실천이다. 가능한 한 이 의지를 생활에 공백 없이 적용하고자 온 신경을 관심 분야에 쏟아붓는 것이다. 게다가 역사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즉 상영시간이 무한대인 흥미로운 영화와 같다. 이러니, 아저씨 소리를 듣더라도 오늘도 두꺼운 역사책을 펼치는 수밖에.
최민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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