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12) 청암교회 전도사로 사역… 정원교회 개척하며 아내 만나

임보혁 2024. 1. 3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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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당시 한국의 장로교회는 둘로 갈라졌는데 난 개혁주의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신학교를 택했다.

그 무렵 장로교는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갈라진 후 예장합동 측은 부산 고려신학교 측과 합쳐졌다.

청암교회는 1948년 9월 이환수 목사 주도하에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다섯 명이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다.

1963년 10월 청암교회 여전도회의 지원으로 정원교회로 부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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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의 꿈 안고 학과 조교로 근무
청암교회 청년대학부 전도사로 섬기며
한 집사님의 중매 통해서 아내와 결혼
청수곡교회(정원교회 전신)를 개척한 초창기 시절 개척 멤버 사진. 뒷줄 가운데가 림택권 목사. 정원교회 제공


1959년 당시 한국의 장로교회는 둘로 갈라졌는데 난 개혁주의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신학교를 택했다. 박형룡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의 영향을 받고 싶었다. 총회신학교 기숙사에 입주하고 생활비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벌었다. 특히 교회에서 주보를 ‘가리방’(등사기)으로 제작했는데, 난 다행히 글씨를 제법 잘 쓰는 재주가 있어서 용돈을 벌 수 있었다. 또 박경신 권사님, 선우 집사님 형제분을 비롯해 등록금을 무명으로 입금해 주신 분들이 많았다. 전부 다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당시 여름방학엔 기숙사 식당이 문을 닫아 대부분 학생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난 갈 곳이 없어 홀로 남게 됐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지냈다.

무엇보다 최근에도 가끔 연락하는 친구 최삼열을 잊지 못한다. 그 친구는 개학해서 학교로 돌아오면 나 혼자 기숙사에 있는 것이 불쌍하다며 고향에서 갖고 온 음식들을 주곤 했다. 그 외에도 고마운 친구들이 많았다. 3년 전 서울역에서 그 친구를 만나 택시를 타고 옛 기숙사 자리를 찾아갔지만, 하늘 위로 치솟은 아파트 단지뿐이라 세월의 무상함만 느꼈다. 63년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말이다.

당시 서울 용산역 옆에 있었던 신학교 건물은 바로 옆 건물이 철공소여서 몹시 소란스러웠다. 용산역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는 더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내 유일한 소원이 미국 유학이었기 때문이다. 신학교 본과와 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는 일단 학교 조교로 근무하게 됐다. 졸업 당시 앞으로 교수로 키워낼 사람을 두 사람 정도 가려냈는데 감사하게도 거기에 뽑혔다. 조교로 근무하면서 학교에서는 기초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 무렵 장로교는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갈라진 후 예장합동 측은 부산 고려신학교 측과 합쳐졌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훌륭한 두 신학교 교수님들 밑에서 수업을 받았으니 이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2년 후 고려 측은 대부분 환원됐지만 말이다. 이후 총신대 출신 강사로서 많은 군소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것도 감사할 일이다.

이후 서울 용산구 청파동 청암교회에서 청년대학부 전도사로 섬길 기회도 얻게 됐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당시 담당 목사님의 후임으로 가게 된 것이다. 청암교회는 1948년 9월 이환수 목사 주도하에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다섯 명이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다.

이 교회와 맺은 인연은 담임 목회 사역의 시작과 함께 지금은 별세한 아내 림현숙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1963년 10월 청암교회 여전도회의 지원으로 정원교회로 부임하게 됐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사건이 있던 무렵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한 집사님의 중매를 통해 만났다. 같은 달 26일 우리는 청암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는 다른 분이 정원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돼 내가 대신 맡게 됐다. 정상적인 교회 개척 과정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돌아보면 신혼여행이 곧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연결된 축복(?)과도 같았던 순간이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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