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윤 대통령에 직언하는 경제관료, 왜 한 명도 없나" [박성민 정치의 재구성]
지금 정부, 관료를 시종처럼 대해
이런 분위기 탓 공직의 헌신 소멸
검사로 채운 권력 핵심은 더 문제
시장원리 모르니 정책 실패
한국은 어설픈 진보·보수만 판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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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정치는 표 얻는 기술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운 정치인들이 야기한 극심한 갈등은 국민을 좌절케 하고 나라를 퇴행시키고 있습니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의 재구성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정치인들을 만나 그들의 진단과 해법을 들었습니다.
이번 인물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동연 경기지사입니다. 지난 25일 경기도청 도지사 집무실에서 4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김 지사는 '정치의 재구성'을 묻는 질문에 "양극화 등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 정치개혁"이라며 "여야 모두 공익과 국민 대신 사익과 자기 권력 유지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인터뷰 주요 내용을 ▶공익 개념이 사라진 한국 공직사회 진단 ▶어설픈 진보·보수가 판쳐온 양당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나눠 소개합니다.
안혜리 논설위원
」
(박성민) 집무실에 소파가 없습니다. 명패도 특이하고요.
(김동연) 장관·부총리 때나 아주대 총장 시절에도 소파를 안 썼어요. 근무 시간 80%는 의자 여러 개 놓인 업무용 테이블에서 보냅니다. 집엔 소파가 있지만 드러눕지는 않아요. (웃음) 저 명패는 1983년 경제기획원에 와서 처음 받은 건데 부총리 시절을 포함해 40년 가까운 공직 생활 내내 써왔습니다. 당시 기획원은 직급 상관없이 똑같이 본인 이름 석 자 뒤에 '정직 성실 창의'가 쓰인 명패를 줬는데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아직도 책상 위에 둡니다.
(박성민)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서, 대한민국은 누가 이끌고 있다고 봅니까. 박근혜·문재인 정부 시절엔 정치가 관료를 억압했는데, 윤석열 정부는 검사 출신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법조 세력이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 관료와 손잡고 정치를 누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A : (김) 누가 끌고 가고 있느냐 보다, 법조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정치 엘리트와 여야의 정치꾼들이 정치는 물론 나라를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게 더 심각한 문제 아닐까요. 표면적으로는 한 줌의 소수 정치권력이 나라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면 아래 빙산처럼 거대한 국민·시민·민초의 힘이 늘 작용해왔다고 생각합니다. A : 그리고 '대통령이 관료 손 잡고'라는 표현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거 관료가 국가의 주요 권력을 견인한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이) 자기 부하나 시종처럼 끌고 다닌다고 봐요. 제가 문재인 정부 경제부총리 할 때 (소득주도성장 추진 속도 등) 여러 경제정책을 두고 청와대(당시 장하성 정책실장)와 대립각이 상당했습니다.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는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틀렸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경제관료가 있나요? 제 눈엔 한 명도 없어 보입니다. A :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데 윤석열 정부는 건전재정 외치면서 올해 재정증가율을 2.8%로 못 박았죠. 경기도는 올해 6.8%입니다. 지난해 세수가 2조원 덜 걷혔는데 지역경제 활성화와 취약계층을 위해 추경도 했어요. 만약 제가 윤 정부 경제관료라면 대통령실이 아무리 밀어붙여도 분명히 반대했을 거예요.
(박) 관료를 비롯해 대한민국 엘리트들이 과거와 달리 큰 힘이 없어서 살아남기 위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월급쟁이로 순치됐다는 평가에 동의하는지요.
A : (김) 좀 다르게 보고 싶은데요. (권한이 줄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공익에 대한 헌신의 강도가 현저히 떨어진 게 (무기력한 관료사회가 된) 주요인이라고 봅니다. 현직 때 후배 공무원들한테 ‘내가 왜 공직을 하는지 답을 찾기 어려워도 공직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라’고 했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공직 초반엔 너무 어렵게 살아서 학교에 제대로 못 가고 불공정한 일도 많이 겪다 보니 어릴 때 당한 가치 박탈에 대한 보상심리가 컸을 거예요. 상고 출신으로 17세부터 8년간 은행원을 하다가 1982년 행시에 합격했거든요. 14년 후 정도에야 공직을 왜 하는지 이유를 찾았어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였어요. 힘(영향력)이나 전관예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A :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꽃들이 심겨 있는 큰 정원 같아요. 각각의 꽃이 조화롭게 피어야 아름다운 정원이 되죠. 그런데 정원이 제대로 유지되려면 각자 자기 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꽃들이 안 하는 허드렛일이나 퇴비 역할 같은, 더 신경 쓰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게 퍼블릭(공공 부문)이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이젠 기업에까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개념이 도입됐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공공 부문은 거꾸로 이런 개념이 약해지고 있어요. (박) 관료는 왜 더는 헌신하지 않을까요. 윤석열 정부에서 검사가 요직을 독식하면서 이런 문제가 더 심해진 걸까요. 그렇다면 해법은 뭘까요.
A : (김) 관료의 전문성이 점점 낮아지는 동시에 (과거 관료만 가능했던) 정보 접근성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관료들이 (정치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 같아요. 여러 정부를 거쳐오면서 관료가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 윤석열 정부에서는 아주 심해져서 (가뜩이나 희박해져 가는) 관료들의 공익에 대한 헌신을 갉아먹고 있죠. 정치 분위기가 공공 부문의 공익의 가치를 점점 말살시키고 있어요.
A : 해법은 공직 사회 인센티브 시스템의 획기적 변화입니다. 과장 때 '중앙 부처 과장급 이상은 철밥통을 깨자, 직업 안정성이 공직사회의 쥐약이다' 이런 얘기를 해서 엄청 욕먹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처럼 직업 안정성 원하는 사람은 반복적 일만 하는 대신 승진은 없고, 큰일 할 사람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도전해 장·차관은 여기서 나오도록 공직사회의 인센티브 시스템을 바꿔보자는 거죠. 지난 대선 때 행시 폐지하고 공무원 채용 방식을 다양화하자고 제안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행시는 물론이고, 특히 법조계는 굉장히 제한적 경험을 가진 비슷한 사람들이 일정 시험만 통과한 후 철밥통을 차거든요. 물론 똑똑한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이렇게 비슷비슷한 붕어빵들만 모여 있으면 소신껏 일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금방 사회화가 돼버려요. 상사한테 어떻게 잘 보여야 원하는 자리로 이동하고 승진할 수 있는지 뻔히 보이거든요. 저는 여기에 굉장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A : 공무원이 동일한 집단이 된 것보다 권력 핵심이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지는 건 훨씬 심각한 문제죠. 비단 검사라서 문제가 아니라 어떤 직종도 다 마찬가지예요. 좋은 집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 나오고 엘리트 코스만 밟아 어려운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배경이 법조인이든 관료든 다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1970년대 사회심리학자인 어빙 재니스 예일대 교수가 정립한 '집단사고(group think)' 현상이 나타나기 쉬우니까요. 권력의 다원화가 안 되면 다들 사고방식이 비슷해서, 보스가 얘기하면 그저 따라갈 뿐 다른 의견은 제시 못 합니다. A : 공직 사회 내부의 변화와 함께 우리 사회도 공직을 존중하는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제복(공직)에 대한 존경이 대단하죠. 그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국민이 존경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잖아요. 누군가 헌신한다면 사회는 계속 기리는 분위기, 그게 선순환이 되서 공직 스스로도 더 헌신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고작 200년밖에 안 된 미국도 이렇게 잘 하는데 우리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한다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 전부를 헐뜯고 욕하고 흔들면 되겠습니까. (박) 지금은 대중이 정치인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이 대중에 주눅 든 시대죠. 정치인은 대중을 받드느라 관료를 세게 압박하면서 점점 포퓰리즘으로 갑니다. 대중의 정치 지배력은 강화했고, 대중에 대한 국가 관리시스템의 통제력은 약화했고, 관료에 대한 정치 시스템은 강해진 상태,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균형이 깨졌습니다.
(김) 덧붙이자면, 거꾸로 선출된 권력이나 정치 시스템 자체가 균형을 깨는 것도 무시할 수 없어요. 트럼프 집권 후 견제와 균형이 무너진 걸 보고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쓴『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도 과거엔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망했다면 최근에는 선출된 권력에 의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도 꼭 짚고 싶어요.
(박) 하이에크가 『자유 헌정론』뒷부분에 남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글에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의 삼분법이 나옵니다. 한국사회에 대입해보면 1990년대는 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쥐고 보수주의와 연정한 자유의 시대, 정치의 전성기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라는 운동권 위주의 문재인 정권에서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보수주의자인 윤석열 정부에서 자유주의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봅니다. 다시 복원시킬 수 있을까요.
A : (김) 공직의 퇴행과도 맞물린 문제인데요. 뭘 복원하기에 앞서, 우리 대통령이나 권력자들이 자유가 뭔지 알기나 할까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기는 할까요.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자유·공정·상식, 이런 단어를 많이 쓰지만 실제로 이런 가치에 대해 얼마나 고민할까요.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6년 (옛)기획예산처 국장 시절 심혈을 기울여 대한민국 비전을 담은 비전 2030이라는 정책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금 폭탄’이라는 정치 프레임에 말려 시작도 못 해보고 좌초했죠.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왜 정치권은 내용 한 번 안 보고, 토론 한 번 안 하고 반대하는가. 정치인들이 얘기하는 가치와 이념과 철학이란 대체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지금도 똑같아요. '이재명 표''윤석열 표' 등 적대적인 누구누구의 표가 붙으면 무조건 반대하잖아요. 어쨌든 그 후 한직으로 밀린 끝에 1년 가까이 미국 생활을 하게 됐는데요. 결과적으로 가치와 철학을 공부하는 좋은 계기가 됐죠. 흔히들 부정적 의미로 말하는 공무원 틀을 벗어나는 계기가 됐고요. 나중에 청와대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기반이 그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A :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굉장히 지키기 어려운 제도들이에요. 게다가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들보다 더 위기를 겪고 있죠. 어설픈 보수는 시장원리를 주장하면서 시장 만능주의로 가요. 어설픈 진보는 시장 만능주의를 깨자면서 시장원리를 깨려 해요. 제대로 된 진보와 제대로 된 보수는 둘 다 똑같이 좋은 가치인데,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어설픈 보수와 어설픈 진보가 판쳐왔고, 여전히 판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시장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죠. 그런데 과정에서의 불공정, 결과에서의 불형평이라는 두 가지 태생적 결함이 있어요.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시장원리를 살려서 경제를 발전시키면서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똑같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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