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 분열하듯, 동 파이프 단면이 소나무 되고 뿌리 되고

손영옥 2024. 1. 3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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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래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생명의 그물망’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는 중견 이길래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동 파이프 단면을 재료 삼아 만든 나무 조각의 둥치가 천장까지 치솟고 뿌리는 사방으로 뻗어있다. 사비나미술관 제공


2000년대 초의 어느 날의 일이다. 시간 강사로 밥벌이를 하던 40대 초반의 이길래는 차를 몰며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내의 직장이 있는 충북 청주와 인접한 괴산 작업실에서 서울에 강의를 하러 가던 길이었다. 무심히 운전을 하던 그는 어느 순간 앞을 달리던 트럭에 적재된 동 파이프가 그려내는 무늬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 파이프의 둥근 단면이 세포 단위처럼 보였던 것이다.

서울 은평구 진관1로 사비나미술관에서 이길래(63)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생명의 그물망’을 한다. 개막에서 앞서 지난 24일 만난 작가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길래 작가. 사비나미술관 제공


“시골 작업실 근처에서 호박, 고추 등을 키웠는데, 열매가 자라는 걸 보며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어요. 생명의 근원으로서 세포에 한창 꽂혀 있던 때라….”

전시는 그 때 그 시절에 본 동 파이프 단면을 세포 삼아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 조각의 향연장이었다. 2층 메인 전시장에 들어서면 천장이 트인 3층까지 치솟은 7m 높이 거대한 소나무 둥치와 그 기둥에서 뻗은 뿌리가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타원형으로 눌린 동 파이프 단면을 벌집처럼 이어붙이면 금강송 굵은 줄기의 표면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의 재료가 됐다. 앞뒤가 보이는 투과성이 매력적이었고, 스스로 부식해 색을 내는 구리의 성격은 마법을 부렸다. 어떤 화학 약품을 쓰는가에 따라 옅은 갈색, 짙은 갈색 등 색이 달리 표현됐다. 사철 푸른 소나무의 초록 잎도 색을 칠한 게 아니라 구리 스스로 부식해 내는 색이다. 그런 구리를 그는 ‘친구 같은 재료’라고 했다.

이 작가는 원래 조선대 미대에 다니며 구상회화를 배웠다. 지역에서 하던 홍익대 순회전에서 회화도 조각도 아닌 실험적인 미술 작품이 나온 걸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그는 자퇴를 하고 다시 미대 입시에 도전했다. 하지만 바로 성공하지 못했고, 군대 제대 후에야 경희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조소 전공으로 졸업했다.

전업 작가 초기인 90년대 후반에는 땅을 파낸 뒤 그 속을 거푸집을 삼아서 유물처럼 드러내는 ‘잃어버린 성’ ‘발굴’ 연작으로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팔릴 리 없는 작품을 하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니 동 파이프 단면을 세포 단위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미술 형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동 파이프를 떡국 썰 듯 잘라서 이어 붙여 추상적인 작업을 했다. 그러다 자연의 상징으로서 구체적인 형상의 나무 작업을 했다. 2008년 사비나미술관에서 나무 작업으로 전시를 했는데, 동 파이프가 주는 표면의 느낌이 소나무 껍질처럼 투박했는지, 기자들은 그를 ‘소나무 작가’라고 명명했다. 내친 김에 소나무 연작을 하게 됐다. 전시장 3층에서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 같이 푸른 잎을 매단 소나무를 볼 수 있다. 마치 동양화에서 튀어나온 듯 소나무가 조각이 돼 서 있고, 절벽에 매달린 듯 벽에 걸려 있다. “미술작업을 처음에 회화로 시작해서 그런지 조각을 회화처럼 하고 싶었어요.”

소나무 입체 작업은 그러나 사진을 보고 조형한 것은 아니다. 소나무의 표피, 줄기 등을 평소 유심히 관찰하지만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소나무다. 그는 그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소나무”라고 말했다. 입체를 표현할 때 시간의 더께를 입히려 애쓰는데, 세월의 무게에 관심을 갖다보니 구리선을 둥글게 이어붙인 ‘나이테’ 시리즈도 나오게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뿌리에 집중한 신작이 많이 나왔다. 뿌리는 바닥에 조각처럼 세워져 있기도 하고 벽을 타고 가듯 부조처럼 설치돼 있기도 하다. 엄동설한인 요즘에도 건강을 위해 맨발걷기를 한다는 그는 “발이 다칠까 조심조심 걷다보니 오히려 나무뿌리에 더 눈길이 가게 됐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바위를 형상한 작품. 사비나미술관 제공


‘돌’도 새롭게 나온 연작이다. 그는 “어느새 죽음을 더 생각하는 나이가 됐지 않냐. 저도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저 돌덩이, 바위도 숨 쉬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지구를 구성하는 유기체가 아닐까. 지구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환경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이 자신의 이론과 비슷하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고 덧붙였다.

이길래의 소나무 조각 작품은 해외에서 더 인기가 있다. 그는 “국내 미술시장이 유독 회화만 선호하는 것과 달리, 구미 컬렉터들은 조각도 선뜻 사며 유명세를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면 흔쾌히 구매하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이 작가는 조각이 홀대받는 문화와 관련해 국립현대미술관 책임론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가 지나치게 회화와 평면 위주로 흘러가다보니 미술시장도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조각 분야의 대표적 원로 S작가도 회화 작가가 되지 않았느냐”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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