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다 죽겠다... 메시지 알리는 데 성공한 경산 청년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사과인 듯하지만 아닌 것이 능금이다. 능금 하면 예전에는 대구 능금이었다. 그런데 대구 능금의 상당 부분은 실은 대구와 맞닿은 경산의 능금이었다.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더불어 해방 5년 전인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됐다. 다음날 마지막으로 발행된 이 신문 3면에 경산 능금 이야기가 나온다.
'본사 특파원 좌담회' 기사에 따르면, 지방부장과 국내외 특파원 11명이 참석한 가운데 8월 9일 오후 2시 조선일보사 귀빈실에서 좌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원산 특파원 유동민은 원산 송도원해수욕장의 1일 방문객이 3만 명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한 다음, "그러면 오재동 씨, 경북 이야기를 들려주시오"라며 바통을 넘겼다. 그러자 경북 특파원 오재동은 이런저런 설명을 하다가 "대구 능금은 전조선적 명물인데, 그 팔할이 경산에서 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1959년 4월 27일 자 <조선일보>에도 있다. 이 기사는 "대구에서 삼십리, 불과 뻐스로 30분이면 닿을 곳에 있는 경산군은 주민들이 동대구라고 말하고 있으리만큼 대구와는 가까운 곳"이라고 한 뒤 "흔히 우리가 대구 능금이라 말하지만, 그 실은 경산 능금을 대구 능금이라 부르고 있다고 주민들은 불평"이라고 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산 사람들이 능금과 관련해 전혀 다른 이유로 불만을 품었다. 능금 재배의 이익이 일본인 쪽으로 대거 흘러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식민지 경제의 착취 구조가 경산 능금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2002년에 <농업사연구> 창간호에 실린 이호철 경북대 교수의 논문 '개화기 서양 능금과 과수 재배기술의 수용'은 토종 능금이 서양 능금에 자리를 내준 과정을 설명면서 "1905년부터 한국의 곳곳에서는 새로이 과수원을 조성하려는 일본인 농업 이민들이 갑자기 증가하였다"고 한 뒤 "1910년 경이 되면 서양 능금과 과수 재배의 과실은 대개 일본인 농업 이민들의 손에 장악"됐다고 설명한다.
경산도 마찬가지였다. 능금 재배를 위해 땀 흘리는 쪽은 한국인들이지만 이익을 착취하는 쪽은 일본인들이었다.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경산은 식민지배의 불평등성을 느끼기가 특히 용이한 곳이었다.
그런 경산에서 1944년에 터진 대규모 항일 사건이 강제징용·강제징병 거부 투쟁이다. 1940년대 들어 일제의 전쟁 동원이 극성을 부리자, 안 그래도 불만이 많았던 이곳에서 그런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최외문·안팔십·이일수 등이 참여한 '대왕산 죽창 의거'가 그 사건이다.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에 있는 대왕산 죽창의거 기념공원 |
ⓒ 한국학중앙연구원 |
2014년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7집에 실린 역사학자 장성욱의 '일제 말기 경산 결심대의 강제동원 거부 투쟁'은 "(능금) 수익은 고스란히 일본인에게" 돌아갔다며 "여기에 더불어 자행된 각종 농업 침탈은 대왕산 의거 가담자에게 직접적인 저항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태에서 강제징용이 강화되자, 경산시 남산면에서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산면사무소에 근무하던 박재천과 김인봉이 강제동원을 거부하고 청년들을 탈출시키려는 논의를 시작하자, 29명이나 되는 마을 청년들이 집단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박재달이 제안하고 박재천·김인봉이 주도한 이 운동에 최외문·안팔십·이일수 등이 참여했다. 2022년에 <역사교육논집> 제81집에 수록된 김일수 경운대 교수의 '일제강점기 경산 지역 민족운동'은 이 청년들이 "일제에 충성하여 징용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어차피 죽은 목숨 일제에 항거하다 죽자"는 박재달의 제창에 호응했다고 대구지방보훈청의 <대왕산 죽창의거 항일운동>을 근거로 설명한다.
청년들의 첫 회합은 1944년 7월 5일 경산시 남산면 사월동의 참외밭 원두막에서 열렸다. 남곡리에 사는 최외문이 가담한 것은 7 8일 제2차 회합 때였다. 7월 15일 제3차 회합 때는 29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조직 명칭을 결심대(決心隊)로 정했다. 일제와 헤어질 결심으로, 싸우다 죽겠다는 결심으로 그런 명칭을 정했던 것이다. 그런 뒤, 군대식 체계를 구성했다. 대장 안창률과 부대장 김명돌 휘하에 3개 소대를 두고 정보연락대와 헌병들을 두었다. 박재달·박재천·김인봉은 정보연락대에 배치되고, 최외문은 제3소대장에 임명됐다. 안팔십과 이일수는 2소대에 배치됐다. 위 김일수 논문은 이들의 투쟁 방책을 이렇게 정리한다.
"참석자들은 대왕산을 탈출 장소 내지 은거지로 선정하고, 자신들이 거주할 막사를 지을 연장, 취사 도구를 준비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방어할 무기로 죽창을 만들기로 하였다."
대원들은 해발 615.7미터(현재 기준)인 경산시 남부의 대왕산에 막사를 짓고 죽창을 준비했다. 예전에 성곽이 있었던 이 산은 마을과 가까운 데다가, 경사가 심해 외부 침입자를 상대하기 좋았다. 돌과 바위가 많아 투석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30대 최만갑과 10대 최동식을 제외하면 나머지 27명은 전부 20대였다. 이런 청년들이 대왕산을 기반으로 무력항쟁을 각오했다. 경산군도 아니고, 남산면에서 29명이나 그런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증오가 얼마나 널리 확산돼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당시의 일본 군대와 경찰은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죽창과 돌을 들었다. 그것도 지리산 같은 데가 아닌, 자기 동네에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꽤 무모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무모하지 않았다.
이들은 죽을 결심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싸워서 이기겠다가 아니라 싸우다 죽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군경을 자극했다. 죽창과 돌을 들고 집 근처에서 일본 군경을 기다린 것은 그런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징용·징병 되느니 그냥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대왕산 죽창의거 참여자들 |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결심대와 일경의 전투는 7월 27일 이후부터 8월 5일 사이에 3차례 있었다. 전투 양상을 위의 장성욱 논문은 이렇게 묘사한다. 일경이 하산하라고 협박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협박도 통하지 않고 더욱 강력히 하산을 거부하는 대원들에게 일경은 총으로 위협하였다. 이에 대원들은 준비해둔 돌을 산 아래로 던지고 큰 바위를 굴려 공격하였다. (중략) 대왕산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돌을 던지고 바위를 굴리면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탓에 일경들과 경방단은 산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경찰 외에 소방 조직까지 가세한 이런 전투가 계속되다가 결국 일경들이 물러섰다. 무장 경찰이 수십 명이나 동원됐는데도 죽창과 돌을 든 청년들을 이기지 못했다. 항일 의지와 더불어 지형적 요인도 작용한 승부였다.
청년들은 전투에서는 3전 3승을 거뒀다. 그러나 준비해 간 식량이 고갈돼 식량 확보를 위해 이동하다가 8월 10일과 13일 사이에 전원 체포됐다. 대장 안창률은 고문받다 순국하고, 제1소대원 김경화는 옥사했다. 나머지는 구속됐다가 해방 이후까지 순차적으로 출소했다.
결국에는 다 붙들렸지만, 일본의 승리는 절대 아니다. 돌과 죽창을 든 쪽이 총을 든 쪽을 세 차례나 이겼다. 돌과 죽창을 든 쪽이 붙들린 것은 전투에 져서가 아니라 굶고 지쳐서였다. 돌과 죽창을 든 쪽은 징용을 거부한다는 원래의 목표까지 달성했다. 이들을 미쓰비시·일본제철·히타치조센·후지코시 같은 전범기업에 보내지 못한 일본의 패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심대원 29명 중에서 최외문·안팔십·이일수는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이것이 이들의 항일투쟁 자체를 흠집 내는 요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른 듯하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1990년과 1991년에 건국훈장을 받은 데 비해 박재천은 2021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박재천 사례를 감안하면, 최외문·안팔십·이일수와 관련해서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한일 역사 현안은 강제징용이다. 징용 피해자들의 승전보가 대법원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다. 이로 인해 미쓰비시·일본제철·히타치조센·후지코시가 최근 들어 연달아 패배했다. 이 에너지는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에서 생겨난다. 이런 거부감이 생겨난 데는 경산 청년들의 헌신이 크게 작용했다.
능금의 고장에서 태어난 경산 청년들은 더 이상 착취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일본 기업에 끌려가 노예노동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싸웠다. 그런 뒤 자신들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우리에게 알리는 데 성공했다.
지금의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는 것 이상으로 강제징용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음을 경산 청년들은 똑똑히 보여주었다. 이들이 만든 에너지가 여전히 살아 작동하기에, 한국인들이 뒤늦게나마 강제징용 소송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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