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칸센을 타고도 6시간 반, 가고시마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에서 배를 탔습니다. 한 시간여의 항해 끝에 구마모토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더 아래로 가면 규슈의 남쪽 끝, 가고시마입니다.
▲ 가고시마 중앙역 |
ⓒ Widerstand |
특히 가고시마는 오랜 기간 오키나와와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때로는 교역이었고, 많은 기간 식민 지배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설탕을 비롯한 특산품을 독점할 수 있었죠.
가고시마의 옛 이름은 사쓰마(薩摩)였습니다. 사쓰마는 시모노세키, 즉 조슈(長州)와 함께 메이지 유신의 선봉에 선 지역이었죠. 사실 막부 말기, 사쓰마와 조슈의 입장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둘 모두 막부의 핵심 권력과는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죠. 조슈는 처음부터 막부를 적대했습니다. 반면 사쓰마는 어떻게든 막부 권력에 진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은 사쓰마 영주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막부의 외척 세력이 되는 데 성공한 것이죠.
▲ 가고시마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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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는 일본의 여러 세력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빠른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정부 수립 10년 만에 막대한 수준의 개혁이 이루어졌죠. 엄격하고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던 신분제는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평민과 사족, 화족이라는 단순한 구분만 남았죠.
무사의 특권도 사라졌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무사들이 칼을 차고 다닐 수 없게 했습니다. 과거 일본에서 군인은 특권 계층이었지만, 곧 모든 국민이 군인이 될 수 있게 바뀌었습니다.
1871년에는 옛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영토를 모두 몰수했습니다. 영주들은 전부 자기 지역을 떠나 도쿄로 올라오라고 명령했죠. 메이지 정부는 영주들을 몰아내고 지방을 직할하기 시작했습니다.
▲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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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사쓰마는 다른 지역보다 옛 사무라이 계층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높았습니다. 급진적 개혁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 불만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이고를 비롯한 불만 세력은 무사 세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눈을 돌린 대상은 조선이었습니다. 마침 조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보낸 국서를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었죠.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을 정벌해 무사의 권위를 높이고, 무력으로 개항을 강요해 경제적 이익을 얻자고 주장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자신이 직접 조선으로 가겠다고 했죠. 여기서 조선이 자신을 죽이면 그것을 침공의 명분으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 세이난 전쟁의 사쓰마군 본부 터 |
ⓒ Widerstand |
그러나 여전히 각지에서 반란은 이어졌습니다. 불만은 격화되고 있었죠. 그리고 결국 1877년, 가고시마에서 힘을 모으던 사이고는 정부군과 충돌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한때 자신이 몸담고 이끌었던 메이지 정부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일본사 최후의 내전인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의 시작이었습니다,
▲ 세이난 전쟁 당시 남은 총탄의 흔적 |
ⓒ Widerstand |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1기 메이지 정부는 막을 내린 셈입니다.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유신 정부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이토의 시대에도 급진적인 개혁과 서구화는 이어집니다. 이토는 조선 병합 직전까지, 또 유신의 한 시대를 이끌게 되죠.
▲ 가고시마의 상징 사쿠라지마 |
ⓒ Widerstand |
하지만 가고시마에서는 여전히 사이고 다카모리의 인기가 상당합니다. 가고시마 곳곳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과, 그를 테마로 한 기념품을 볼 수 있습니다. 유신 3걸 가운데 오쿠보 도시미치도 가고시마 출신이지만, 사이고의 인기를 따라오지는 못하죠.
이 패장(敗將)이 이토록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가 조선을 정벌하자고 말했기 때문에, 우익 세력이 사이고를 존경하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사이고가 주장한 정한론이 현실성 없는 치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도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사이고를 추종하던 이들은, 세이난 전쟁 이후 메이지 정부를 강력히 견제하는 재야 세력이 됩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독재'를 비판하며 헌법 제정과 민주적 선거를 주장했고, 자유민권운동의 주축으로 성장합니다. 역설적인 일이죠.
하지만 그 역설이야말로 가고시마와 메이지 유신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신을 시작했지만, 또 그 유신 정부를 끝나게 했던 땅이 가고시마였으니까요. 팽창주의를 주장했지만, 또 반체제 민권운동의 시조가 된 사이고라는 인물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면 근대성과 중세성, 혁명성과 반동성을 모두 가진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 가고시마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할 지도요. 혁명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한 가고시마에서, 유신과 근대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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