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에 목숨 위협받던 현종, 점괘까지 본 이유
[김종성 기자]
▲ KBS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
ⓒ KBS2 |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지난 28일 제22회까지 쟁점이 됐던 것 중 하나가 고려 주상의 친조(親朝) 문제다. 고려 군주가 거란 군주를 친히 찾아가 알현할 것인가에 관한 양국의 교섭과 갈등이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끌었다.
고려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을 군사적으로뿐 아니라 외교적 방법으로도 종결시켰다. 고려 현종은 전쟁 발발 1개월이 안 된 음력으로 현종 1년 12월 10일(양력 1011년 1월 16일) 요나라에 친조를 자청했다. <고려사>의 보충판이자 축약판인 <고려사절요>의 현종 편은 "표문을 올려 알현을 청하였다"고 말한다. 외교문서의 일종인 표문을 올려 직접 찾아뵙겠다는 뜻을 전했던 것이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가 알현의 의미로도 쓰인 것은 임금과 신하의 회합이 아침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임금과 신하의 회합처가 조정(朝庭)으로 불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에 찾아뵙다', '조정에 찾아뵙다' 등의 의미가 조(朝)에 함축됐고, 이것이 알현을 지칭하는 글자 중 하나로 쓰이게 됐다.
이런 친조는 황제와 제후, 혹은 천자와 제후 사이에나 어울렸다. 평화적 관계에 있는 국가의 군주가 친조를 하면 그것은 제후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전쟁 중인 국가의 군주가 그렇게 하면 이는 제후를 자처하는 것에 더해 항복을 한다는 표시였다.
위의 친조 자청이 있은 뒤에도 고려군과 거란군은 계속 전투했다. 그래서 사실상의 항복 선언인 친조 선언이 유야무야해졌다. 그러자 고려는 한편으로는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친조 문제의 효력을 살려두는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다.
친조하겠다는 표문을 전한 지 20일이 지난 현종 1년 12월 30일(1011년 2월 5일)이었다. 이 시점의 거란군은 친조 요청이 거짓인 것 같다는 판단하에 현종의 신병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날 현종은 점을 쳤다. 이번에도 친조 카드를 해서 한번 더 속일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점을 쳐보니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현종은 신하들에게 표문을 쥐어주고 거란 군영을 방문하게 했다. 표문에는 정말로 찾아뵙고 싶었지만 거란군이 두렵기도 하고 고려 내부의 분란이 있기도 해서 친조를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적혀 있었다. 이 표문을 받은 뒤에 거란군은 현종에 대한 추격을 멈추었다.
<고려사절요는>는 현종 2년 1월 3일(1011년 2월 8일)에도 요성종에게 사신이 파견됐다고 말한다. 고려 사신이 "군대를 돌이켜줄 것을 요청했다"고 <고려사절요>는 알려준다. 철수를 요청했다면 친조 이야기도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인 현종 2년 1월 19일(1011년 3월 6일)에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되돌아갔다. 한편으로는 고려 의병과 관군이 끝까지 대항하고 또 한편으로는 친조 카드를 앞세워 요성종을 교란하며 철군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굴복이나 항복을 뜻하는 친조를 자청하면서도 고려가 전투를 계속한 것은 친조 이야기가 거짓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요성종이 거듭거듭 귀가 솔깃했던 것은 고려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항복을 받아냈다'며 당당하게 철군할 명분이 그에게도 절실했던 것이다.
▲ KBS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
ⓒ KBS2 |
한민족은 거란족 이외의 민족들을 상대로도 친조 카드를 곧잘 사용했다.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수나라의 고려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는 613년에 제2차 침공을 당하고 614년에 제3차 침공을 받았다. 제1차 때 대패한 수양제의 집념으로 인해 이런 무모한 침공이 거듭 되풀이됐다.
그런데 제3차 때 수양제는 커다란 성과를 갖고 돌아갔다. 고구려 영양태왕(영양왕)의 친조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 군사력만으로 적군을 몰아내기 힘들 때에 이런 카드가 사용되곤 했다.
고려는 30여 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을 무승부로 끝낸 뒤인 1264년에 몽골에 대한 친조를 실제로 단행했다. 전쟁 자체는 무승부로 끝냈지만 더 이상의 대결 관계를 이어가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고려 군주들이 몽골 수도 대도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외국에 대한 친조 약속은 한민족 왕조들이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친조 카드를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일이 고려 말에 있었다. 위화도회군(1388)으로 집권한 이성계·정도전 그룹이 그런 일을 했다. 이 그룹은 우왕을 몰아내고 그 아들 창왕을 옹립한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이 카드를 활용했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는 껄끄럽기는 해도 전쟁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명나라가 고려 군주의 친조를 먼저 요구하지 않는 한 고려가 굳이 이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성계 그룹은 이 이슈를 선제적으로 일으켰다.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이 시기의 친조 자청을 첫 번째로 수행한 인물이 당시의 석학인 목은 이색이다. <고려사> 신창열전에 따르면, 문하시중 이색이 명나라에 파견된 것은 1388년 겨울이다.
<고려사> 이색열전에 따르면, 이색을 접견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중국어를 잘하지 않느냐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색은 급히 중국어로 "친조를 정합니다(請親朝)"라며 본론을 꺼내들었다. 뜻밖의 말을 듣고 급하게 중국어를 하는 바람에 본론부터 꺼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주원장은 이색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색열전은 오랫동안 중국에 가지 않은 탓에 중국어가 매우 어색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원장은 "뭔 소리야?(說甚麽)"라고 물었고, 그의 신하가 이색의 말을 풀이해줬다. 주원장은 "그대의 중국어는 꼭 나하추 같아"라고 말했다. 대대로 만주 지방을 관리한 원나라 무장 나하추가 중국어를 하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비교적 괜찮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고갔지만, 명나라는 친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에 방문한 사신들의 요청 역시 수락되지 않았다. 고려 스스로 명나라에 굴복하는 퍼포먼스를 제안했는데도 주원장이 거부한 것은 고려에 대한 불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는 고려가 여진족을 끌어들여 자국을 압박할지 모른다고 경계했다. 얼마 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이 요동정벌(만주정벌)을 추진한 데서도 증명됐듯이 그런 경계심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고려는 몽골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외국에 대한 친조 약속을 절대로 지키지 않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친조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명나라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조 요청이 수락되지 않은 데는 이것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계 그룹이 국위 손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친조를 자청한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왕의 친조를 희생제물로 삼아 자신들에 대한 명나라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친조 문제를 놓고 명나라와 교섭하는 과정을 통해 위상을 높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때는 거란군을 돌려보낼 목적으로, 창왕 때는 이성계 정권의 위상을 높일 목적으로 친조 카드를 사용했다. 이렇게 몽골 때의 예외를 제외하면 한민족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으로 정상외교를 다뤘다. 이성계 측이 거듭 친조를 자청하는데도 명나라가 냉담했던 데는 고려 외교에 대한 전통적인 불신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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