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건 ‘철도 지하화’...“사업성·필요성 제대로 따져 골라야"[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도심을 가르는 철도를 지하로 내리고, 그 위에 생기는 부지를 개발하는 내용의 '철도 지하화'에 시동이 걸렸다. 정부가 지난 25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교통 관련 민생토론회에서 발표한 ‘교통분야 3대 혁신 전략(속도ㆍ주거환경ㆍ공간혁신)’ 중 공간혁신의 대표 사업이 바로 철도 지하화다.
철도로 인한 도심 단절과 주변 지역 슬럼화 해소 등이 목적인 철도 지하화는 서울은 물론 인천·수원·대구·부산·대전 등 주요 도시 지역에선 오랜 숙원사업이다. 대선이나 총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야의 단골 공약인 이유다. 이번에도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31일 수원을 방문해 철도 지하화 공약을 발표할 거란 소식이다.
그동안 철도 지하화가 오랜 기간 '희망 고문'에 그쳤던 건 무엇보다 돈 때문이다.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달할 막대한 사업비 마련이 쉽지 않아서다. 정부는 철도부지와 인접지역 등 상부 공간을 개발해서 철도 지하화 비용을 충당토록 할 생각이다. 민간사업자가 채권 발행 등을 통해 먼저 건설비를 조달해 지하화 사업을 진행한 뒤 상부 개발로 얻은 이익으로 이를 회수하는 방식이다.
이러면 정부나 지자체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사업 추진이 가능할 거란 계산이다. 윤 대통령도 민생토론회에서 “재정만 투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상부 공간 개발 이익을 건설 재원으로 조달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하겠다”며 철도 지하화 계획에 힘을 실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오는 3월 전국을 대상으로 지하화 노선과 구간, 상부 개발 구상, 철도 네트워크 재구조화 등을 담은 종합계획 수립에 착수할 예정이다. 대상노선은 사업성과 균형발전 등을 고려해서 내년 말께 선정한다.
철도 지하화 사업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철도지하화 및 철도부지통합개발에 관한 특별법(일명 철도 지하화법)’도 이달 초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는 지하화로 생기는 상부 공간은 역세권의 경우 환승 거점·중심업무지구 등 고밀도로 복합 개발하고, 선로 주변 지역은 철도부지와 함께 통합 재정비를 추진할 방침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서울역~구로역 구간은 서울국제업무 축, 부산의 가야~부전~서면은 신 광역클러스터로 조성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또 별도로 대선 공약을 중심으로 지자체 제안을 받은 뒤 재원조달방안과 사업성 등 계획의 완결성이 높은 구간을 연말께 선도사업으로 선정할 계획이다. 오송천 국토교통부 철도건설과장은 “선도사업이 되면 종합계획 수립 이전부터 기본계획을 만들기 때문에 최소 1~2년 단축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경부선·경인선ㆍ경원선), 부산(경부선), 대구(경부선), 인천(경인선), 대전(경부·호남선) 등이 지하화를 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만 보면 철도 지하화 사업이 순조로울 듯싶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우선 사업성 확보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철도부지는 역 주변이나 복복선 구간 등 비교적 공간이 넓은 곳을 제외하곤 대부분 좁고 기다란 ‘선형’이라 대규모 개발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선형인 철도부지는 개발 이익으로 사업비를 회수해야 하는 민간사업자에겐 절대 매력적인 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경철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넓은 부지의 용산역세권 개발도 사업성 부족 등으로 표류하고 있는데 선형인 철도부지의 개발 수익이 얼마나 나올지 의문”이라며 “철도 지하화는 특별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업성 자체가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엔지니어링업체 관계자도 “정치권에서 언급하는 경부선·경인선전철 전 구간 지하화는 도저히 사업성이 나올 수 없는 비현실적 구상”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철도 주변에 이미 주택과 건물 등이 밀집한 곳이 많아 이들을 수용해서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자칫 상부 공간 대부분을 공원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서울의 경의선숲길이 대표적 사례다. 해외에서도 기존 철도를 대규모로 지하화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2㎞ 안팎의 철도를 지하화하는 사업이 진행되는 정도다.
반면 박민규 한라대 철도운전시스템학과 교수는 “철도부지가 선형이라고 하더라도 향후 도시개발계획을 설정하는 데 있어선 선로 유무에 따른 부지 활용성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도시발전방안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정된 재원을 철도 지하화에 투입하는 게 맞느냐는 문제제기도 있다. 이장호 한국교통대 철도공학부 교수는 “지하화 개발이익은 그 선로 주변지역에서 주로 보는 것이어서 효과가 제한적”이라며 “전반적으로 지하화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사회적 편익이 지엽적이고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진석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철도 신설을 요구하는 지자체에는 투자를 주저하면서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의 기존 철도를 다시 지하화하는 건 재원 활용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며 “인구 감소 시대에 인프라 중복 투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철도 지하화는 사업성과 필요성 등을 깐깐하게 따져서 선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정훈 교수는 “철도 지하화를 하려면 사회경제적 타당성이 충분하고, 재원조달에도 문제가 없는 구간을 골라내는 게 필수”라며 “1년, 2년 빨리하는 것 보다는 새로운 미래도시를 만든다는 목표로 차분하게 꼼꼼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광균 송원대 철도운전경영학과 교수도 “대규모 사업보다는 선로부지가 넓고, 그 자체로도 선로용량이 포화해 지하개발 필요성이 높은 데다 상업개발이나 녹지 확보 등 상부공간 활용 가능성이 큰 곳을 엄격하게 골라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침 윤 대통령도 지난 29일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도시발전을 위해 소통할 방안으로 전체 구간을 지하화하지 않아도 1㎞만 지하화해도 소통이 되고 도시가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전 구간이 아닌 선별적이고 부분적인 지하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재원이 충분하고, 사업성까지 확실하다면 대규모 철도 지하화도 못할 건 없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세밀하게 따져보고, 선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자칫 무리했다간 초장에 추진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정확한 선구안 대신 정치적 목소리가 큰 곳이 간택되는 어이없는 상황은 피했으면 싶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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