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배가 알려준 옛 추억 그리고 현재의 사랑 [조남대의 은퇴일기㊹]
생활의 권태를 전지(剪枝)할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떠나는 것이 아닐까. 치유를 위해 사람들은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곳을 향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삶을 위해 충전할 갖가지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 유원지 같은 데 가서 오리배를 타고 즐기다 보면 몸도 마음도 훨씬 가벼워진다. 아내와 함께라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나이 들어 치유라는 게 어디 별건가. 가슴이 답답하거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 가끔 백운호수를 찾는다. 그곳에는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잔잔한 호수와 포근히 보듬어 주는 산과 몸에 생기를 넣어주는 좋은 먹거리가 있다. 또한, 젊은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평소 건강하던 아내가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병원을 들락거린다. 30도를 넘나드는 더운 곳에 있다가 영하의 날씨인 한국으로 와서 그런가. 속 쓰림과 수면장애로 위내시경을 하고 CT까지 촬영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니 몸은 처지고 입맛이 없어 얼굴도 반쪽이 되었다.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모습이 안타깝다. 대신 잠을 자 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지켜볼 수밖에 없어 나도 잠을 설친다. 바람이라도 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좀 좋아질까. 의왕 백운호수를 찾았다. 산과 호수가 빚어내는 가경 앞에 숨을 놓을 지경이다. 굽이진 산길 돌고 돌아 그윽이 내려다보이는 오리백숙집을 찾았다. 몸보신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소문난 맛집이라서인가. 넓은 자리에 빼곡히 손님이 자리했건만 음식은 오랜 기다림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오리백숙은 폭 고아야 제맛인데 뼈가 씹힐 정도다. 여느 집 백숙보다 맛있는데도 아내는 입맛이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깨작거리기만 할 뿐이다. 우리에 갇혀 짧은 생을 살다가 인간의 보신용으로 몸을 내주어야 하는 오리는 얼마나 애처로운 신세인가. 아내의 모습이 오리 못지않아 보인다. 사람들은 ’소고기는 줘도 먹지 말고, 돼지고기는 있으면 먹고, 오리고기는 남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뺏어서라도 먹으라‘는 말을 하면서 부지런히 오리고기를 찾는다. 이런 소문은 오리에게 얼마나 치명적이며 애간장을 태울 것인가.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니 어쩌겠는가. 오리가 희생되더라도 아내의 건강이 회복되어 이전처럼 활달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자위한다. 오리에 대한 어쭙잖은 정서를 도리질하며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백운호수로 발길을 옮겼다.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다. 데크가 깔려 있어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쌀쌀한 날씨지만 많은 시민이 쉬엄쉬엄 산책하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빨리 걷기도 한다. 바람이 없어서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대부분 두툼한 옷에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복장이다. 과잉 보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연인을 보면 아들딸이 데이트하는 것처럼 신선해 보인다. 지긋한 나이의 부부가 앞뒤로 간격을 두고 종종걸음으로 남편을 따라가는 아내를 보자 우리 부부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40년을 발맞추어 걸으려고 해 봤지만, 태생이 경상도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산 쪽에서 내려와 호수로 들어오는 물가에는 얼음이 얼지 않아 오리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을 거치면서 흘러들어와 부유물이 섞여 있어 먹을 것이 있는가 보다. 호수가 꽁꽁 얼어 오리들도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지 수십 마리가 모여 있다. 갈색 오리가 대부분이지만 꽃무늬로 감싼 알록달록한 오리도 보인다. 호수에 터 잡고 사는 오리는 보통 몸집이 큰 데 비해 그보다 작은 것으로 보아 잠깐 들리는 철새가 아닌가 한다. 먹이를 찾아 철 따라 이곳저곳으로 수백 킬로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고스러움은 있을지 몰라도 생을 저당 잡힌 백숙집 오리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일까. 사육되는 오리는 수명이 겨우 몇 개월일 텐데 철새들은 20여 년이나 산다고 한다. 자유를 구가해야 삶이 윤택한 것은 사람이나 동물도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손님이 드문드문하다. 호수의 정적을 닮아서인가. 건강의 노란 신호 때문인가. 한산함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휴일이다. 평소 라떼를 좋아하던 아내가 속이 좋지 않아 녹차를 시킨다. ‘빨리 좋아져서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한다. 애잔함을 보이기 싫어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창 너머 호수에는 오리배들이 얼음에 갇혀 있다. 물이 얼기 전까지는 연인과 가족, 친구를 태우고 호수 곳곳을 다니며 유람했을 텐데. 꼼짝 못 하고 갇혀 있어 얼마나 답답할까. 날이 풀리고 버들강아지 눈 틔울 때쯤 되어야 손님들을 태우고 호수 이곳저곳을 신나게 다닐 것이다.
오리배는 여러 번 타 보았지만 군대 가기 전 미팅했던 아가씨와 탔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제비뽑기로 파트너를 정하고 대구 수성못으로 가서 오리배를 탔다. 애인이 없던 처지라 군대 가면 편지라도 보내줄 연인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친구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힘껏 밟아 으슥한 곳으로 가서 구애 작전을 벌였는데 어느 정도 호감을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단체 사진을 찍고 헤어지기 전에 간신히 주소를 받았다. 힘든 훈련소 교육받으면서도 사진을 꺼내어 오리배 탔을 때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여러 번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없다. 함흥차사다. 공수 훈련받으면서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11미터의 모형탑인 ’막타워‘에서 뛰어내릴 때 조교의 지시에 따라 다른 전우들은 애인 이름을 목청껏 외치는데 나는 어머니를 부르며 떨어져야 했다. 그때의 씁쓸함이란. 차라리 오리배를 타지 않았으면 이런 아픈 추억은 없었을 텐데. 그 이후로는 오리배를 타지 않았다.
역시 추억은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한다. 과거의 아픈 추억을 떠올리며 싱긋이 입꼬리가 올라가거나 이맛살을 찌푸리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 쓸쓸하다. 오리배를 보면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지만, 그 여인의 얼굴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이제는 사십 년 이상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가 있지 않은가. 지금 다시 막타워에서 뛰어내린다면 ’경희야‘를 힘차게 외칠 수 있지만, 그럴 기회가 언제 다시 올까. 상상만으로도 새 힘이 솟는다. 아내의 몸에 새싹이 돋아나고 호수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다시 오리배를 힘차게 밟으며 생의 탄력감과 윤택감에 취해 볼 수 있으리라.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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