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프랑스 농민의 '파리 공성전'…트랙터 800대로 도로 봉쇄
정부와 EU의 농업정책에 항의하는 프랑스 농민 시위대가 29일(현지시간) 오후 트랙터 800대를 동원해 수도 파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8곳을 모두 봉쇄했다. 도로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해 사실상 파리를 봉쇄한 시위대는 텐트와 이동식 화장실, 발전기까지 설치한 채 장기간 농성할 계획이다. 프랑스 정부는 성난 농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트랙터 800대, 곳곳엔 바리케이트…'파리 공성전'
프랑스의 실시간 도로 교통량 정보를 제공하는 시타댕(Sytadin)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직전 30대의 트랙터가 파리 동쪽에서 20마일 떨어진 고속도로 A4를 차단했다. 이후 파리 북서쪽으로 35마일 떨어진 A13의 통행이 막혔고, 이후 A1·A5·A6·A10·A15·A16 도로까지 줄줄이 폐쇄됐다. 프랑스 전국도로교통연맹은 이날 저녁까지 파리 주변 고속도로에서 156㎞에 달하는 교통 정체가 보고됐으며, 운송이 전면 중단됐다고 전했다.
전날 농민들이 예고했던 ‘파리 공성전’이 가시화되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주요 내각 장관을 소집하고 긴급 비상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프리스카 테베노 정부 대변인은 “대통령을 포함해 정부가 총동원됐다”면서 30일 대책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장관은 농민 시위대의 트랙터가 파리를 포함해 다른 대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과 헌병 1만5000명을 동원했다. 특히 파리 북쪽의 샤를 드골 루아시 공항과 오를리 공항, 남부 지역의 렁지스 농산물 국제 도매시장을 정상 운영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세계 최대 식품 도매시장 중 하나인 렁지스 도매시장은 파리와 근교 도시의 1200만 명에게 제공되는 신선 제품의 60%를 공급하는 곳으로, 앞서 다르마냉 장관은 “이곳을 봉쇄하면 레드라인을 넘는 것”이라고 시위대에 경고했다. 당국은 장갑 경찰차 등을 시장 주변에 배치해둔 상태다.
시위대는 트랙터에 “우리는 침묵 속에 죽지 않는다” “우리(농민)의 종말은 당신(프랑스 국민)의 굶주림”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고 있다. 지도부는 파리 봉쇄를 “생존을 위한 마지막 전투”라고 강조했다.
프랑스 전국농민연맹(FNSEA)의 아르노 루소 대표는 RTL 라디오에 “우리의 목표는 프랑스인을 괴롭히거나 그들의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정부를 압박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까지 농민들은 일체의 폭력 행위 없이 도로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의 환경에너지관리청(ADEME)은 시위로 인해 심각한 혼란이 이어질 경우, 파리에는 3일분의 식량만 남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아직 파리로 가는 2차 도로는 열려 있어, 이를 통한 운송은 가능한 상태라고 BBC는 전했다. 이에 대해 스테판 산체스 FNSEA 파리 지부장은 “정부가 수용 가능한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나머지 도로까지 모두 봉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랜 기간, 깊은 분노가 적체된 결과"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농민 시위에 대해 “오랜 기간 적체된 다양하고도 깊은 분노의 결과”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비료 가격의 폭등, 대형 유통업체의 마진 폭리와 원가 인하 전가 부담, 해외 농산물과 자국 농산물에 대한 이중잣대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그린딜(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달성) 정책이 도입되면서 ▶트랙터 등 농업용 차량 작동에 필요한 디젤 가격 상승 ▶유기농 재배 의무 강화 ▶경작지 최소 4% 휴경 의무화 등의 규제가 추가됐다. 가디언은 “농부들은 EU와 프랑스 정부의 관료주의와 일방적인 규제에 목이 졸리고, 전통적인 농촌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 무너지고 있다고 호소해왔다”고 전했다.
규제 증가, 생산 비용 폭등, 소득 감소 등이 누적되면서 프랑스 농민들은 “쉴새없이 일하고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좌파 성향의 프랑스 언론 자코뱅은 전했다. 프랑스 국민통계연구소(INSEE)에 따르면, 현재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는 프랑스 농가 비율은 17.4%로, 생산직(13.9%)·사무직(12.1%) 근로자보다 높고, 전국 평균(9.2%) 대비 두배 가량 많다.
프랑스의 국민 여론은 농민들에게 공감하는 분위기다. 시위 양상이 격화되고 있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시위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지지율은 80%가 넘는다. 특히 프랑스 국민 94%는 ‘자국 농산물에 적용하는 재배 기준을 수입 농산물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시위대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젤 가격 상승 철회, EU와 대책 논의
프랑스 정부는 성난 농심과 국민 여론을 감안해 시위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지난 26일 농가를 방문해 디젤 가격 상승 계획 철회하고, 대형 유통업체의 마진 폭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아탈 총리는 “농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농민이 없으면 프랑스도 없다”고 강조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다음달 1일 브뤼셀에서 우르술라 폰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만나, EU 차원의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마크 페노 프랑스 농업장관은 EU와 휴경지 확대 의무화 등 EU의 그린딜 관련 규제를 일정 부분 유예하거나 면제받는 방침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농민 시위대는 최소한 다음달 1일까지 파리 봉쇄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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