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절반이 女, 복귀·재입사도 환영…"실력만 있다면"[K인구전략]
전 세계 지부 임원들 모여 같은 고민 공유
한국P&G, 공동체 다양성 확보 노력까지
편집자주 - 대한민국 인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기업에 있다. 남녀 구분 없이 일로 평가하는 기업 내 분위기와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곧 K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적어도 일터에서의 부담감이 걸림돌이 돼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아경제는 가족친화정책을 선도하는 기업을 찾아가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지점을 짚고,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기업과는 다각도에서 함께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기업부터 변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분석한다. 금전적 지원보다 심리적 부채감을 줄여주는 회사의 문화와 분위기가 핵심이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다양한 측면에서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 회사에서만큼은 경력단절에 대해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지난 18일 오후 1시 서울 중구에 위치한 BAT로스만스 본사에서는 마케팅팀의 회의가 한창이었다. 최은지 BAT로스만스 마케팅 이사(37·여)와 직원들이 함께 모여 열띤 토론을 하며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BAT그룹에서 약 9년을 근무한 최 이사는 "BAT로스만스에서 성과를 내고 경력을 쌓는 데 있어 성별과 직급, 결혼과 출산 여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오히려 출산과 육아를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14년 전 BAT 일본 지점에 입사 후 6년간 재직했다. 이후 다른 회사들을 거쳐 3년 전 한국 지점에 재입사를 하게 됐다. 그는 "BAT만큼 커리어에 대해 같이 고민을 해주는 회사가 정말 드물었다"며 회사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말했다. 개인의 커리어는 본인 스스로가 꾸려가야 한다는 점이 크지만 회사가 얼마나 전폭적 지지를 해줄 수 있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최 이사는 설명했다.
커리어 위해 재입사도… ‘커플 테라피’처럼 경력 코칭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과 승진 차별. 일하는 여성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고민이지만 외국계 회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업이 ‘성별 다양성’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세계적 흐름이 반영된 결과다.
임원 중 50%가 여성, 관리자급 가운데 40%가 여성. BAT로스만스는 ‘던힐’ ‘글로’ 등의 담배 제품으로 알려진 BAT그룹의 한국 지사로, 업계 특성상 남성 직원이 많을 것 같지만 이처럼 대표적인 여성 친화 기업이다.
BAT로스만스는 여성의 커리어 개발을 돕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위민 인 BAT’는 그룹사 전체에서 운영하는 여성 커뮤니티로, 전 세계 여성 직원이 온오프라인으로 매년 한 번씩 모여 커리어 경험을 공유하고 각종 교육과 멘토링을 받는다. 한국 지사에서는 2012년 설립된 여성 리더십 프로그램 ‘아테나’를 출범시켰고, 2017년부터 여성을 포함한 다양성의 개념으로 그 취지와 범위를 확장했다. 이뿐만 아니라 ‘위민 인 스템(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계열)’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 네트워크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커리어 지원을 하고 있다.
또 온오프라인으로 연 2회 ‘위민 인 리더십’을 통해 여성 직원을 대상으로 리더십 교육을 지원하는 체계도 갖췄다. 1대 1 리더십 교육을 비롯해 프레젠테이션 스킬, 경력 관리법, 팀 이끄는 법 등 실무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프로그램도 활용 중이다. 단순히 교육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팀 내에서도 업무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최 이사 역시 이 제도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제 상급자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외부 전문가까지 셋이 모여 면담을 했어요. 코치가 상급자에게 평소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제게도 이런 내용이 맞느냐고 확인하더라고요. ‘커플 테라피’ 상담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각자의 입장을 최대한 리더십 개발에 반영하려 한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나아가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 전 세계 지점 직원과 화상 회의로 리더십 교육도 진행한다. 리더십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바탕으로 교육을 듣고 각 그룹으로 나눠 멘토링과 함께 토의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최 이사는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다양한 나라의 여성 임원과 네트워킹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각국 여성 임원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털어놨을 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 임원이 ‘나는 비슷한 문제를 겪을 때 이렇게 돌파하려고 해봤다’고 말을 해줬다"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룹 내에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롤모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됐다"고 했다.
‘경단녀’ 100% 복귀에 해외 파견
김건희 대외협력본부 홍보 이사(40·여)는 이전 회사를 퇴사하고 3년간 육아를 하다가 지난해 BAT로스만스에 입사했다. 그는 자신을 대표적인 ‘경단녀(경력단절 여성)’ 사례였다고 소개했다. 김 이사는 "실업급여가 끝나면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만 쓰기가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며 "10년 넘게 홍보 일을 했지만 3년 쉬고 일을 하려고 하니 막막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그러던 중 BAT로스만스에서 연락이 와서 입사하게 됐어요. 실력만 있으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줬죠." 아이가 있든, 휴직 경험이 있든 능력과 경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언제든 복귀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제도로도 보장돼 있다. BAT로스만스의 대표적인 가족 친화 정책은 ‘복귀 100% 보장제’다. 출산 휴직, 육아 휴직 등을 사용하고 난 후 복귀할 때 팀 배정이나 승진 등에서 불이익이 없도록 제도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정주희 인사팀 차장은 "육아휴직 후 복귀할 때 페널티가 없도록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며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 삶을 위해 휴식을 하고 돌아왔을 때 당연히 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어야 하고, 그걸로 인해 전혀 손해가 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회사 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회사인 만큼 해외파견 기회도 적지 않은데, 여기서도 누구에게나 차등 없이 기회가 열려있는 회사 방침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해외지사에 파견을 나가 있는 한국지사 직원 13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7명이 여성 직원이다. ‘해외 파견은 주로 남자 직원이 간다’는 고정관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BAT로스만스의 여성 직원들이 고민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성장할까’의 문제다. 최 이사는 "사내 프로그램에서 공유했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나만의 스타일을 살려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가’였다"며 "내가 있는 위치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내야 하는지, 그 안에서 나의 역량을 어떻게 키워나갈지, 일과 삶의 균형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집중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거인이라도… 도움 줄 파트너라면 유급휴가
한국P&G 역시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치로 내건 회사다. 한국P&G는 2019년부터 임원을 포함한 전 직급에서 여성 비율을 50% 이상 유지하고 있다.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복지 제도는 여성 인재의 업무 효율성을 뒷받침한다. 대상자들은 출산 전후 유급휴가를 법으로 정해진 60일보다 긴 108일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결혼하지 않은 동거인이라도 육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라면 유급휴가를 제공한다. 김수진 한국P&G 인사팀 부장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해 조직 내 성별 다양성을 확보하는 건 장기적, 거시적으로 경영성과에 도움이 된다"며 "성별 다양성은 다양한 소비자의 수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국P&G는 사내 여성을 넘어 회사 밖으로도 관심을 돌리고 있다. P&G는 2019년부터 성별,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는 사회 문제를 논하기 위해 ‘위씨이퀄(WeSeeEqual) 서밋’을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2025년까지 아시아태평양·중동·아프리카 등 지역 내 여성 기업에 총 3억달러(약 4022억원)를 지원하고 경력단절을 겪는 이공계 분야 여성 인재를 돕는다. 한국P&G 역시 2025년까지 여성이 창업하거나 대표로 있는 국내 기업에 대한 투자를 2배 이상 확대하기로 했다. 지난해 5월 한국P&G는 ‘나다움’을 주제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해 성장 과정을 소개했다. 시각장애인 유튜버 ‘원샷한솔’(본명 김한솔)도 이 행사에 참여해 시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한 경험을 공유했다.
김 부장은 "한국P&G는 평등, 포용, 지역사회 소외계층 지원 등 기업 시민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능력에 따른 채용과 승진을 통해 역량과 잠재력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K인구전략-양성평등이 답이다' 김유리·이현주·정현진·부애리·공병선·박준이·송승섭 기자
김필수 경제금융에디터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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