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수익 1000억, 벌금 20억"…中 산업스파이 한국 활개 이유 [구멍 뚫린 K기술]

김정민 2024. 1. 3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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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에 국내 핵심 기술이 유출되는 사례가 거듭되고 있다. 일러스트=김지윤


최근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 등 ‘3대 초격차 기술’을 중국에 빼돌려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정작 범죄수익 환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유출 범죄는 혐의 입증이 어렵고, 처벌 역시 솜방망이에 그치는 데다가 범죄수익 추징조차 제대로 안 돼 구조적으로 산업 스파이를 뿌리 뽑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1000억 벌었는데 고작 벌금 20억…‘추징’ 안했다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의 반도체 세정장비 기술 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원지검은 2022년 5월과 지난해 1월 세메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임계 반도체 세정장비’ 핵심 도면과 별도 ‘습식 세정장비’ 기술을 브로커를 통해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전직 연구원 남모씨 등을 기소하면서 남씨와 남씨 업체 S사에 대해 범죄수익 환수를 위해 584억원을 추징·보전했다. 추징보전은 앞으로의 추징을 위해 확정판결 전 재산처분을 금지하고 동결하는 조치다.

하지만 두 건으로 나눠 진행된 재판에서 1심 재판부는 남씨와 S사의 혐의를 인정해 합계 징역 9년형과 벌금 10억원을 선고하면서도 범죄수익 환수를 위한 별도의 몰수·추징 선고는 하지 않았다. 지난 9일 항소심 역시 징역 9→10년, 벌금 15억→20억원으로 상향하면서도 추징금을 선고하지 않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이 지난 2020년 6월 삼성전자의 반도체부문 자회사 세메스(SEMES) 천안사업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검찰에선 이같은 선고 직후 “징역 10년을 살고 나와도 S사가 장비 수출로 벌어들인 1000억원은 고스란히 남는다”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수원지검은 남씨의 친형이 S사를 이어받아 60억원대 추가수익까지 취득한 점을 적발해 29일 친형 등 9명을 추가로 기소했다. 기술유출 수사 경험이 풍부한 부장검사는 “기술 유출은 구체적인 피해액 추산이 어려워 추징도 난맥상”이라며 “구간별 몰수규정 등이 담긴 특별법 신설이 필요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검찰은 전체 제품·장비의 관점에서 유출된 부품·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부여서 해당 범죄로 인한 손해액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수사 과정에서 중국 등 해외 강제수사가 불가능한 점도 근본적 한계로 꼽힌다.

지난달 대검찰청 용역보고서 ‘기술유출 피해 금액 산정 등에 관한 연구’를 집필한 전우정 KAIST 교수는 “공개된 기술인 ‘특허’와 달리 ‘영업비밀’은 기업이 법원에서도 공개를 꺼리는 특성상 피해액 추산이 더욱 어렵다”며 “여기에 해외 법인을 상대로 민·형사상 구제를 받기란 외교상 문제부터 입증의 어려움까지 현실적 한계가 크다”고 분석했다.


삼성·SK 거친 ‘반도체 전설’이 中복제공장 시도


그사이 중국은 ‘산업 스파이’를 활용해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무서운 속도로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다. 지난달 대통령 소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해외 기술 유출은 92건으로, 반도체 24건〉디스플레이 20건〉2차 전지 7건 순이었다.
핵심 반도체 기술을 중국 업체에 넘긴 혐의를 받는 삼성전자 전직 부장 김모 씨와 관계사 전 직원 방모 씨가 지난달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영장 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지난 3일 서울중앙지검이 반도체 증착장비 관련 영업비밀을 중국에 넘긴 혐의로 구속기소한 김모 삼성전자 전 부장과 협력사 직원 방모씨가 대표적 사례다. 반도체 8대 공정 중 하나인 증착 기술은 반도체 소형화를 결정짓는 핵심 기술이다.

검찰 등에 따르면 이들은 2022년 2~3월 중국 회사의 개발 제안을 수락하고 김씨가 총괄하는 프로젝트팀을 결성해 총 5개 회사 직원을 영입한 뒤, 2022년 5월 협력사 사무실에서 설계도면 1120장을 출력해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반출하거나 수개월에 걸쳐 중국업체 서버나 위챗 등에 영업비밀 600쪽 이상을 올리는 식으로 핵심기술을 빼돌렸다.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통째로 복제한 공장을 중국에 설립하려 한 혐의로 지난해 6월 12일 구속기소한 최씨의 사건 구조도. 연합뉴스

국내 반도체업계의 전설로 평가되는 최모(56)씨가 중국에 ‘삼성전자 복제공장’을 지으려다 실패한 사건도 있다. 최씨는 18년간 근무한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퇴직한 뒤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까지 지냈지만, 대만 폭스콘에서 ‘8조원을 투자할 테니 중국에 20나노급 D램 반도체 생산공장을 지어달라’는 일생일대의 제안에 손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폭스콘의 제안은 최종 무산됐지만, 최씨는 국내 반도체 핵심인력 200여명을 영입하고 삼성전자 시안공장 설계도면 등을 빼돌린 혐의로 지난해 6월 수원지검에 구속기소됐다. 하지만 최씨는 5개월 뒤 법원에 보증금 5000만원을 내고 보석됐다. 대통령실 주재 범정부 기술유출 합동 대응단을 출범시킨 사건의 주범이 풀려난 셈이다.


첨단보안도 ‘필사’에 뚫려…‘야동’으로 위장도


본지가 최근 5년간 기술 유출 사건 공소장·판결문 등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첨단 보안시스템이 의외의 고전적 수법에 구멍이 뚫리는 경우가 많았다. 모니터에 도면을 띄운 뒤 휴대전화로 촬영하거나 노트에 필사하고, 양말에 USB를 넣어 반출하는 식이었다. 음란 동영상 파일에 몰래 기밀 문건을 숨겨 위장한 사례도 있었다.

삼성디스플레이 OLED 공정기술 유출 사건을 수사한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연구원들이 핵심 스펙과 도면을 반복적으로 열람해 수첩에 복기하고, 위장업체 사무실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유출이 이뤄졌다”며 “대기업의 견고한 보안시스템을 ‘메모 필사’처럼 전통적이고 단순한 방법으로 무력화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기업 보안이 뛰어난 만큼 역설적으로 개인적 친분이나 위계를 이용해 ‘한 번만 보자’라거나 ‘노트북을 두고 왔다’는 식으로 영업비밀에 접근한 경우도 다수였다. 이렇게 받아낸 자료들은 주로 메일·위챗·텔레그램 등으로 오갔다. 검찰 관계자는 “결국 사람의 욕심으로 벌어지는 범죄인 만큼 범죄 유인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실상 ‘징역이 남는 장사’라는 인식을 고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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